믿을 때 감동이 없었어도 (5) 언제 구원 받았을까?

 

언제 구원 받았을까?

사람 혼동시키는 짓궂고 얄궂은 질문 이다.
그러나 이런 질문, 이런 짓궂은 상황은 우리로 하여금
평소에 당연히 여겼던 사실이나 상황에 대하여 새롭게 생각하여 정리하게 해주는 좋은 역할을 한다.

내 대답은…
“중요한 것 아니니 신경 쓰지 말자“이다.

그런데 권위 있는 신학자가 이 말을 했다면 “아 그런가 ”하고 논쟁이 끝나는데
나 같은 사람이 이 말을 하면 “네가 뭔데 건방지게…”가 된다.
이래저래 장황한 설명을 하게 된다.

다른 질문을 해보자.
우리가 육신의 생명을 인정받는 것은 언제일까?

(1) 어머니 뱃속에서 나왔을 때? 그러면 태중에서 태동할 때는 아닌가?
(2) 그러면 임신 3개월 후?
(3) 난자와 정자가 수정 되었을 당시?

이게 문제가 될까?
살아있으면 질문 꺼리가 안 되는 것이다.

이 아이를 낙태시켜 생명을 끊으려면 “언제 부터 생명으로 인정할 것이냐” 하는 것이
법적으로 중요하니 선을 긋는다. (생명을 끊을 때 면죄부를 주기 위해서)

나는 내가 언제 태어났는지 사실 모른다.
부모님이 네 생일은 “몇년 몇월 몇일”이야 라고 해서 그런 줄로 아는 것이다.
나만 그런가? 다들 그럴 것이다.
그러나 산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살아있고 죽지 않았음을 안다.
영생도 마찬가지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세주로 믿고 있으면 나는 구원 받은 것이다.
그래도 내가 “살았나 죽었나” 의식하고 있는 것은 중요하다.

내가 구원 받았나?
영생을 얻었나?
하나님 자녀인가?
하는 질문을 가끔 해보는 것은 중요하다.

이단이라고 욕을 먹는 구원파 사람이 “당신은 구원을 받았습니까?”라고 질문을 한다던데…
그것은 중요하고 참 좋은 질문이다.
그들이 나쁘다고 그 질문도 나쁘다고 함은 모순이다.
(좋은 것을 이단이 못쓰게 만들다니 역설이다)
강도가 칼 들었다고 나도 식칼 안 쓰면 뭘로 요리하나?
중요한 것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인정하고 믿었느냐”,
다시 말하면 “구원을 받았느냐” 하는 것이다.

다른 질문을 더 해보자.
식물의 씨앗은 살았을까 죽었을까?
언제 살았을까?
씨가 맺혔을 때 살았나?
싹이 트면 살았나?
꽃이 피면 살았나?

하나님께서 자연 현상을 통하여도 우리에게 암시(말씀)하시는 바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님 섭리가 칼로 싹 끊어내듯 되지 않는 것도 꽤 있는데 인간은 논리적으로 나누어 정의 내린다.

내 경우를 보자
나는 언제 구원 받았나? 언제 예수님을 믿었나?

(1) 주일학교 잠깐 다니면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라고 찬송했을 때?
(2) “하나님이 계시기는 계실 텐데“ 라고 생각했을 때?
(3) 고교시절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외웠을 때?
(4) 교회에 앉아서 설교를 들었을 때?
(5) 성경 한번 읽어 보고 대학 가려고 하루 종일 머리아프도록 신약성경을 억지로 읽었을 때?
(6) 예수님을 구주로 믿겠다고 처음 영접했을 때?
(7) 성경 공부하다 (6)번이 의심스러워
“예수님 혹시 아니면 지금 저의 마음에 주님이 되어주세요”라고 다시 또 기도했을 때?
(2,3번씩이나 했다. 하하하…)
혼동 될 수도 있다
나는 (6)번이라고 믿는다. 내가 처음 하나님 앞에서 나의 믿음을 고백한 때이기 때문이다.

(1)-(5)은 내가 어머니 뱃속에서 수태되어 자라는 것처럼
주님 만나기까지 때가 익어가는 기간이 아니었을까?
(7)번은 내가 영적 의식이 자라면서 믿음을 확인한 우스꽝스러운 해프닝이다.
어릴 때에는 “엄마 정말 엄마가 날 낳았어?”라고 물어보기도 하지 않나? (의심스러워서)
그러면 엄마는 “물론 내가 널 낳았지, 왜?”라고 대답하지 않나? (신분 확인 시켜 주신다)
그런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몇년 몇월 몇일”이 명백하다.
논리적으로는 중요하지 않아도 참 다행 이라 생각한다.
주님과 처음 만난 날을 기억할 수 있으니까.
첫 사랑의 추억 멋있지 않나?

그러나 그게 불확실하다고 해서 뭐가 문제란 말인가?
“지금 내가 예수님을 내 구주로 모시고 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우리는 …
12제자, 사도 바울, 언제 구원 받았는지 몰라도 신경 안 쓴다. 모두가 위대한 사도들 이시니까.
말하는 내가 바보.

이디오피아 내시, 고넬료, 빌립보의 간수, 언제 구원 받았는지 확실히 안다.

두 부류의 사람들의 차이점이 감이 가십니까?
감이 안 가도 큰 문제는 아니다.

내가 생각해도 나는 생각이 쓸데없이 복잡하다.
이게 뭐 믿음에 그리 크게 도움이 되겠는가?

그래도 누군가 나 같이 생각 복잡한 사람의 의문에 답이 되면 참 좋겠다.
혹, “나를 자랑하는 글이다“라는 오해 마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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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6회에 걸친 내 이야기
(1) 영접하는 자
(2) 죄의 회개?
(3) 쓰린 추억 – 심각한 죄의 회개
(4) 회개. 왜 그게 인상 깊을까?
(5) 언제 구원 받았을까?
(6)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2 thoughts on “믿을 때 감동이 없었어도 (5) 언제 구원 받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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