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타와 바늘귀

   

[마태 19:24-26]
24 2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
25 제자들이 듣고 심히 놀라 가로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26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

이 구절에 대한 흥미있는 해석이 꽤있다.
“바늘귀는 아주 작은 성문이다”,
“낙타는 낙타가 아니라 원어의 발음이 비슷한 밧줄인데 필사본 옮길 때의 오류다” 등등.
옛날부터 유명한 교부, 신학자, 목사들이 이런 말을 하셔서 너도 나도 그렇다고 하는 듯.

(참고)
Google에서 “낙타와 바늘귀”로 검색을 하면 기기묘묘한 해석 참 많다.
(
무작위로 몇 개,
글을 지웠거나 website가 없어진 것도 있다.
http://gyusikjung.blogspot.com/2014/01/blog-post_27.html

https://dthumb-phinf.pstatic.net/?src=%22https%3A%2F%2Ft1.daumcdn.net%2Fcssjs%2Ficon%2F557567EA016E200001%22&type=w480

http://www.baboschool.com/%EB%82%99%ED%83%80%EA%B0%80-%EB%B0%94%EB%8A%98%EA%B7%80%EB%A1%9C-%EB%93%A4%EC%96%B4%EA%B0%80%EB%8A%94-%EA%B2%83%EC%9D%B4/
)

낙타와 바늘귀는 세상에서도 불가능한 것을 하려할 때에 많이 비유된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비유를 왜 그와 같이 해석할까?
왜 그리스도인들도 그렇게 이해하는 사람이 많을까?

(1) 문자대로 이해하면 불합리하니 깊은 뜻이 뒤에 숨어있다고 생각해서
성경에 비유가 많고 예수께서도 따로 풀어주셨으니, 이것도 그렇게 한다.
(2) 성경 필사본에 오류가 있었다고 생각해서 (가능성 있음)
(3) 존경하는 유명한 분들이 그렇다니까 (대세를 따른다)
(4) 돈 많으면 천국 못 간다니 어찌하든 달리 해석하고 싶어 (배금주의)
(5) 이렇게 이해하면 멋있으니까 (나도 예전에 그랬다)

여기에 나는 의문을 제기한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따로 풀어주지 않으셨고, 제자들도 곧 알아들어서 다시 묻지 않았다.
오히려 돈 갖고는 구원 받을 수 없다고 잘 이해해서
“그러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을까요?” 라고 질문을 했다.
예수님의 말씀은 “사람이 돈을 사랑해서는 결코 구원 받을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 은혜로 구원 받는다”는 단도직입적인 선언이다.

실제로 이 청년은 슬프게 떠났지만 재산 절반을 나누어 준 삭개오는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눅19:9) 말씀을 (칭찬으로) 듣지 않았는가?
반 남은 재산도 굉장할 텐데 (절반 남았어도 틀림없이 부자였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는 말씀이라고 제자들도 다 이해했다.

내가 주일학교 선생 때 부른 찬송에도 있다.
주일학교 어린이들도 다 알았을 것이다. 재미있게 춤도 추었다. (기억하시는지?)

주일학교 어린이도 잘 아는 것을 유명하신 분들이?
그런데 왜? 이런 웃기는 해석을…?
주일학교에서는 제대로 가르치고 설교는 제 맘대로 달리하나?
어느 쪽이 옳은가?
(
여기서 사도 베드로가(죄송하지만) 귀여운(?) 질문을 하셨다.
[마태복음 19:27]
“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사오니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나는 사도 베드로가 근엄하지 않고 나처럼 뭔가 부족한 듯하나 세월이 갈수록
멋있는 분이 되셨다는 것이 참 정이 가고, 닮고 싶고 좋다. 베드로 전후서 좋아한다.
물론 주님께서도 책망 않으시고 베드로 사도를 격려해 주셨다.
)

본론으로 돌아가서, 그 옛날 제자들이 즉시 알아들은 것을
왜 일부의(?) 후세 사람들은 달리 생각 하냐는 것이다.
(웃기지 않나?)
성경 문맥을 앞뒤만 읽어 봐도 알 수 있는 데 말이다.

왜 나 보다 똑똑하고 원어도 공부하고 역사도 열심히 공부한
훌륭하신 분들께서 이렇게 해석했을까?
성경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글이라는 것에 대한 믿음이 흐려져서,
성경의 권위를 무시해서라고 생각한다.

더 영적(?)이고 현명한 나는 더 큰 비밀을 알 수 있다는 교만이 아닐까?
(이 말을 하는 너도 그렇지 않으냐고 비난한다면 할 말이 없다)
심오한 것, “너희가 모르는 대단한 신비한 비밀을 내가 알아서 이렇게 알려 준다“고
이들은 “주님께서 부족하게 설명하신 것을 내가 다시 잘 설명 한다” 말하는 것이니 오만이며 불신이다.

주님께서 “내가 성경에는 이렇게 썼지만 (그건 좀 미흡하니)
네게만 특별히 (진실을) 보여 주고 더 알려줄께” 라고 말씀하셨다 말하는 것과 같다.
이렇게 황당한 모순과 오류가 있겠는가?
성경 말씀의 왜곡, 변형이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성경이 하나님 말씀이니 더하지도 빼지도 말라고 말할 것이다.

이런 사람은 성경을 잘 읽지도 생각하지도 성경에 권위를 두지도 않는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어떤 때는 공연히 화가 난다. “이 사람들은 생각이 있나 없나 선입관에 사로잡혔나?”
이런 사람들의 말을 듣는 사람들이 불쌍하다.
주님의 구원에 이르는 길을 빙 돌려 막고 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는 것”이라고 뒤에 즉시 말씀 하셨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고 바로 말씀하신 것인데….
[마태복음 19:26]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

아마 그 교회에서는
“부자가 못 간 나라” 어린이 찬송은 전혀 모르거나
주일학교의 찬송과 설교는 전혀 다를 것이다.

성경이 하나님께서 자녀인 나를 포함한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말씀이라는 믿음이 필요하다.
특별한 나 에게만 특별히 주신 말씀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그 자녀들이 못 알아듣도록 어렵게 쓰실 리 없지 않은가?

물론, 이해 못해도 믿음으로 받으라고 어렵게 쓰신 것도 있다고 인정한다.
다음의 말씀도 있으니까. (나는 베드로 사도가 좋다)
[베드로후서 3:16]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성경을 내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중립적 자세로 앞뒤를 찬찬히 읽으라.
기도하는 마음가짐 이면 더 좋고 그냥 찬찬히 읽어도 된다.

사람은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듣고 싶은 대로 들어서 이해하고 싶은 대로 이해한다.
이해하고 싶은 방향을 이미 마음속에 정했다는 말이다. 선입관 편견이 있다는 말이다.
나도 예외는 아니라고 인정한다. 일단은 성경에 쓴 대로 보고 이해하자는 입장이다.
이 관점에서 중립적이 되려고 노력한다.

그런데
“여기에는 남모르는 깊은 뜻이 틀림없이 있을 거야 그걸 내가 찾아야지”.
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이런 엉뚱하고 기발한 잘못된 해석을 한다고 본다.

“낙타는 낙타가 아니라 원어의 발음이 비슷한 밧줄인데 필사본 옮길 때의 오류다”
라고 한 사람도 그런 종류의 사람이라 생각한다.

내 추론은 이렇다.
헬라어 아람어를 잘 알아서 “낙타” “밧줄”의 발음이 비슷하다는 것을 알았다.
혹은 “밧줄”이라고 쓴 필사본 성경 하나가 발견 되었다.
(큰 발견 혹은 깨달음이다?)
그래서
“아 이것은 필사본의 오류다. 밧줄이 맞다”라고 주장한 것이라 본다.

나는 질문한다.
그렇게 쓴 필사본은 몇 개나 발견 되었는지 조사해 봤나?
“밧줄”이라고 쓴 필사본이 잘못 옮겨 쓴 필사본이라 생각은 하지 않았나?
성경을 옮겨 적은 믿음의 선배 들은 그걸 몰라서 생각이 없어서 거의 모두 다 “낙타”라고 적었을까?
그리고 마가복음, 누가복음도 “낙타”라고 기록했는데 그것은 왜 무시하나?
세 개의 복음서에 같은 단어로 기록했다면 그것이 더 맞을 가능성이 높지 않은가?
그런데 “낙타”나 “밧줄”이나 결과는 같다.

그러나 같은 표현이면 “낙타”가 훨씬 강조가 강하게 된다.
이렇게 생각하면 “성경을 ‘낙타’로 필사한 것이 옳을 것이다”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성경의 필사본이 여럿인 이유는 하나님께서 성령의 인도하심과 이성적인 판단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이 어느 것이 바른지 판단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라고 생각한다.
성경은 그래서 진본이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성경을 잘 이해하고자 원어를 공부해서 성경을 그릇 해석한 대표적인 사례다.
오만과 편견은 이래서 나쁘다. (나도 오만인가?)

“바늘 귀“가 성문이라는 추론도 마찬가지로 반박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이런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너는 왜 내 말을 못 알아 듣냐?
나는 성경에 “A”라고 말했는데 왜, 너는 왜? 빙 돌려서 “B”라고 주장하느냐?”
하지 않으실까?

비유적인 해석, 우화적인 해석은 이래서 나쁘다.
말 뒤에 숨겨진 비밀이 있고 그것을 내가 깨달았다는 교만이 깃들어있기 쉽다.
물론 비유, 우화는 성경에 많이 나오고 대부분 성경이 즉시 풀이했다.

그런데 성경이 풀지 않은 것을 누가 풀어서 원리(교리)화 하듯 주장함은 좋은가?
당연한 결론이지만,
누구는 바늘귀를 성문이 이라하고 누구는 낙타가 아닌 밧줄이라 하면 어떤가?
본인들은 하나님께서 깨우침을 주셨다고 할 터이니 서로 모순이 아닌가?
이 경우에는 문 이건 밧줄 이건 성도의 생활에 실천에는 큰 영향이 없으니 다행이다.
그러나 진지하게 말씀에 순종하고자하는 실천/적용에 관한 경우라면 어떻겠는가?
(그런 태도를 가진 사람 찾기가 쉬울까?)

나는 지금 성경에 나온 비유(그러나 성경에 풀이가 없는) 혹은 비유가 아닌 서술을
우리가 풀거나 성경에 이미 풀이가 있는 것을 다른 의미로 풀어서
주장하는 것의 모순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의 비유(Allegory)를 풀거나 서술적인 교훈도 비유로 보고 다시 풀어서
주장하는 사람을 조심 또 조심하라. (가까이 하지 말라)
성경을 열심히 읽어 두어야 이런 것을 분별할 수 있다. 열심히 읽자.

나는 성경의 비유적 풀이(Allegorical Interpretation)를 반대한다.
단 성경에서 이미 풀어 놓은 것은 인정 한다. 성경에서 이미 풀었으니까.
생각해 보면 하나님의 영적인 진리를 세상의 것으로 표현한 것이 비유(allegory)이다.
그런데 영적인 것을 세상의 것으로 표현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
비유만 가능할 뿐이다.

그런데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말 하면서
그 비유가 불완전하다고 (생각)하여 다른 의미를 부여하여
또 다른 비유를 들어 해석한다면 그는 성경대로 하나님을 믿는 것인가? 아니다.
하나님 나라에 속한 것을 자기가 하나님이 성경에 기록한 것 보다
더 깊이 있게 풀이한다고 하는 말이니 오만도 대단한 오만이다.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것과 별로 다르지 않다.
이런 자의 말 듣지 말아야 한다.

“신학도 모르면서 주제넘게..”라고 내게 말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이 나를 포함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글” 이라는
믿음에서 출발한 논리적인 결론 아닌가?
이 믿음(정의, 가설, 명제라도 좋다)가 틀렸다 하면 이야기는 진행할 수 없다.
모든 학문은 논리적인 사고에 기초를 두고 있지 않은가?

이 말을 주장함은 하나님 말씀을 향한 믿음을 경시함이 결코 아니다.

이야기가 길어졌다.
감각적이고 바쁜 이 시대에 이 긴글을 누가 읽겠나?
(글쓴 난 전문가도 아닌데…)
나 스스로에게 하는 말일 뿐이다.
내가 생각해도 나는 쓸데없이 잡다한데, 생각나는 걸 어쩌나?
내 생각과 다른 분 의견도 중립적 입장에서 듣고자 한다.

요새는 이와 같이 “낙 타 바늘귀를 이해하는 분은 없겠지?”

“부자가 못간 나라”를 한 번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성경을 읽는다.
(내가 반대하는 해석: Internet 상에 많이 있는데 믿지 마시길…)

이 예화를 다음과 같이 풀어 설명했다 하자.
1. 바늘귀는 아주 작은 비상용 성문이다
(가정 1: 바늘귀는 너무나 비상식적이라고 생각해서)
이 작은 문을 낙타가 통과하려면
2. 메고 있는 짐을 다 내려놓고
(가정에서 유도된 추론1)
3. 무릎을 꿇고 기어 들어가야 한다.
(가정에서 유도된 추론2)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고자 하는 자는…
1. 가진 것, 부, 명예, 즐거움 등을 다 내려놓고
(추론에 따른 적용/해석)
2. 겸손하게 무릎을 꿇고
(추론에 따른 적용/해석)
3. 바늘귀 천국문으로 기어 들어가야한다
(마태복음 7:13-14 교훈과 일치됨)

은혜스런 해석 아닌가?
“아멘”하고 따르는 분께 혹시, 은혜가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와 같이 성경을 풀면
[마태복음 19:26]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으로 천국에 들어 간다”고 하는 바로 뒤의 말씀이
“가진 것 다 버리고 겸손히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주님 따라 가는 삶으로 바뀌고 또 행위로 구원 받는다고 오해 될 수 있다
(매우 큰 문제다)
그래도 성경의 다른 부분의 교훈과 일치하니
순진한 마음으로 순종하는 사람에게는 혹시, 축복이 될지 모른다.

그렇다고 가르치는 사람이 성경을 이렇게 풀어서 가르쳐도 되는가?
(이렇게 가르치는 분이 없기를 바라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으로 구원 받아 천국 감을 뭔가 포기하라는
행위로 뒤집어도 되는가 하는 말이다. (비록 가정이지만)

이것은 바늘구멍을 작은 성문이라 가정하고 논리를 전개한 오류이며
“이건 말이 않되 성경 복사에 오류가 있을 거야” 라는
인간의 이성적 논리로 가정과 추론을 더한 잘못된 해석이라고 생각한다.
성경 다른 부분의 교훈과 일치해서 다행이지,
다른 것도 이렇게 “지가복음?”으로 선포하면 어쩌나?
“뭔데 유명한 분 말을”이라고 하면 끗발에 밀리는 수 밖에 없다.

성경 앞뒤 문맥을 무시하고 그럴듯하게 해석하는 것 반대한다.
어떤 말의 일부만 떼어 인용해서 오보를 전하는 신문기사와 같다.
가정이지만 이와 같이 “낙타의 바늘귀” 비유가
“주님 따르는 제자의 길”로 뒤집히는 것 같은 해석을 반대한다.
성경 다른 곳도 이렇게 비유로 뒤집어 해석할까 염려다.

이것과 같지 않더라도 성경에서 이미 해석한 것이 아닌 내용을
우화로 하여 뒤집어 해석하는 것도 싫다.
(그런 사람 수상하게 생각한다)
“낙타 바늘귀”의 이런 해석도 어찌 보면 우화적 해석?”

성도들은 평소 성경을 잘- 읽고 생각해야 이런 것에 현혹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나를 포함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믿어서
먼저 성경을 잘 읽으시라. 유명한 분들도 틀린 말 많이 한다.
성경을 알고 순종하고자하는 마음으로 성경을 읽으면 이해된다.
성령께서 알려 주신다고 믿는다.
음악을 들으면 음악이 들리는 것처럼…

(
이 예의 경우, 누가 이렇게 해석한 내용을(틀렸어도 전체 성경의 교훈에는 무리 없으므로)
순종하여 실천하고자 한다면 OK.
그런 순진한 마음 가진 분을 하나님께서 선하게 인도하시리라 믿는다.

아멘으로 듣고도 양심을 무시하거나 이런 저런 이유로 그냥 살아가는 사람이 허다한 이 세대이니
이런 분도 주님께서는 어여삐 보시리라 믿는다.
내가 뭔 말을 하는 건지, 내가 생각해도 나는 쓸데없이 복잡한 듯

“성경 안 읽는 교우들도 많은데 무슨 소용이랴” 라는 생각도 들고..
)

(모든 의견 환영 합니다)


1 thought on “낙타와 바늘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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