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유”라는 단어는 멋있지만 잘 쓰지 않는 어렵고 낯선 말이다.
나는 성경에서만 본 것 같다.
어려서 성경 공부 할 때 이것이 좋은 말 같기는 한데
무슨 뜻인지 이해가 잘 되지 않았었다.
주님께서도 마태복음 11:28에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라고 하시었다.
유명한 구절이기도 하다.
많은 분이 “온유”에 대하여 많은 좋은 말로 정의를 내렸다.
현학적이고 어렵기도 해서 다 듣고 나면 “뭐더라?”하는 설명이 참 많다.
온유: ‘프라우스’ (πραΰς), ‘프라우테스’ (πρᾳΰτης) … 라고 한다는데
(저는 헬라어 모릅니다. 괜히 유식한 척…)
(인용한 글)
“Naver Blog (감사합니다)님의 2014.1.25.” 에서 인용.
온유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형용사로는 ‘프라우스’, 명사로는 ‘프라우테스’ 입니다. 이것은 야생동물의 성품을 일컫는 단어입니다. 서부영화에서 보듯이 카우보이들이 야생마를 길들이는 장면들을 볼 수 있습니다. 아니면 로데오라고 해서 거친 들소를 길들이는 모습도 보게 됩니다. 결국 온유란 거칠고 난폭한 성품이 길들여져서 따뜻하고 부드러운 성품으로 바뀌게 된 것을 말합니다.
‘즉 야성은 살아있지만 완벽히 길들여진 성품’을 말하는 것이지요. 게다가 그 강한 성품을 주인만을 위해서 쓰기 때문에, 뛰어 가라고 주인이 박차를 가하면 화살이 비 오듯 쏟아지는 적진 속으로라도 뛰어갑니다. 자기 본심으로는 전혀 안 가고 싶겠지만, 그래도 갑니다. 반대로 아무리 더 달리고 싶다 해도 주인이 고삐를 당겨서 서라고 하면 그 자리에서 섭니다. 이 온유함은 철저하게 주인을 위한 성품이기 때문에, 때론 산들바람처럼 부드럽지만 때론 폭풍처럼 거셉니다. 이것이 프라우테스라는 단어의 본 의미입니다.
John MacArthur 의 Grace to You 에서 인용.
Meekness is not weakness; it is power under control. As the writer of Proverbs says, “He who is slow to anger is better than the mighty, and he who rules his spirit, than he who captures a city” (16:32). In contrast, the individual who is not gentle is likened to “a city that is broken into and without walls” (Proverbs 25:28). Gentleness always uses its resources appropriately, unlike the out-of-control emotions that so often are destructive and have no place in your life as a believer
(인용한 글 마침)
나도 감히 “온유”를 나 나름대로 설명한다.
나의 정의는 온유 = Power under Control
온유의 반대는 폭력 = Uncontrolled Power
온유: 상대의 입장을 배려하여 통제, 제어 된 힘, 능력은 온유함이다.
폭력: 통제, 제어 되지 않고 임의로(계획적이든 아니든) 행사하는 능력, 힘은 폭력이다.
(
비인격적인 폭력의 대표적 예는 폭발물(다이나마이트)라고 생각한다.
다이나마이트는 폭발 가능한 최대의 힘으로 터져야 하기 때문이다.
다이나마이트와 같이 발휘되는 능력은 온유가 아니다.
거기에 인격(성질)이 더해지면 폭력이 되는 것이다.
다른 예로 핵폭발이 일어나더라도 핵폭탄처럼 최대한으로 터지는 것은 폭력이고
원자로처럼 폭발이 통제되어 조금씩 일어나 원자력 발전을 하면 그것은 온유이다.
)
온유란 인격적으로 상대를 배려하여 힘을 통제 제어 하며 행사하는 것이다.
“온유 = Power Under Control”이라고 나보다 먼저 정의를 한 분은 꽤 된다고 생각한다.
잘 모르지만 John Mc. Arthur 이 분도 나보다 먼저 이렇게 정의를 했을 것이다.
(다음 예는 온유가 아니다)
우리가 종이컵에 coffee를 따라 마실 때에는
힘을 과도하게 주어 컵을 찌그러트리지도 않고
힘을 너무 적게 주어 컵을 떨어트리지도 않게 힘을 조절(Control)해야한다.
이런 것을 Robot에게 할 수 있도록
기계 장치를 만들고 Program해서 성공하면 대단한 일을 했다고 신문에 난다.
그러나 이것은 온유라고 하지 않고 절묘한 힘의 제어, 조절이라고 한다.
(다음의 예는 온유이다)
어머니가 어린 아기를 안을 때
힘을 과도하게도 적게도 쓰지 않고 아이가 편안하게 안고 있는 모습을 보고
우리는 온유한 혼은 인자한 어머니의 모습이라고 한다.
이렇게 아기를 안으려면 아기의 무게보다 훨씬 더 큰 힘을 조절해야만 한다.
또, 엄마가 아기를 안고 있을 때, 동시에 엄마의 팔은 외부로 부터 아기를 보호하고 있다.
이것이 온유가 실천되는 모습이라 생각한다.
상대방의 형편과 사정에 맞추어 그를 배려하여
힘, 능력을 통제하며 행사할 때에 그것을 온유라고 한다.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를 보기 원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를 바위틈에 숨기시고 뒷모습만 보여 주셨다
이것을 나는 하나님의 온유하심 이라고 한다.
[출애굽기 33:18-23]
18 모세가 가로되 원컨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19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나의 모든 선한 형상을 네 앞으로 지나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반포하리라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20 또 가라사대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21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 곁에 한 곳이 있으니 너는 그 반석위에 섰으라
22 내 영광이 지날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23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
하나님의 그 점을 경험으로 배워서 인지
모세는 온유함이 모든 사람에 뛰어난 사람이라는 말을 들었다.
[민수기 12:3]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
온유는 힘, 능력, 권력을 가진 사람의 필수 덕목이다.
힘없는 자(양 떼)는 온유 하려해도 온유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다만 머릿속으로 학습하고 외워둘 뿐이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상대적으로 온유를 연습하고
실천할 기회가 얼마든지 있다.
나보다 능력, 힘이 떨어지는 사람은 주위에 늘 있기 때문이다.
온유와 반대 되는 예는 비굴이거나 폭력이다
예를 들어
“약자에게 강하고 강자에게 약하다”
“약자에게 군림하고 강자에게 설설 긴다”
이런 게 동물적인 비굴이며, 온유의 반대 개념이다.
늑대 과의 동물은 강자에게 절대 굴종하지만
저보다 약자에게는 매우 폭력적이다.
이런 것은 온유가 아니다.
믿음의 훈련도 상대의 수준에 맞추어 꾸준히 끌어 올리면 온유지만
아무리 경건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기 수준에 맞추어 상대를 잡아 늘이면 종교적 폭력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아브라함이 되게 하실 때도
모세를 모세가 되게 하실 때도
그들의 역량에 맞추어 그들을 끌어 올리셨다.
하나님의 온유하심이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성경에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르고
모세는 온유함이 뛰어난, 하나님을 대면하여 만난 선지자라고 부르신다.
하나님께서는 과정에서 나타난 그들의 부족함은 말하지 않고
마지막 결과를 보고 칭찬을 하신다.
인격적으로 유치한 나는 신앙의 위인들(아브라함, 모세)의 훈련 받을 때의
부족한 모습을 보고 “나와 별다름 없네“ 하며 자위를 한다.
이것은 문제이다. 신앙인이 아니라 하더라도 인격의 미성숙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기회가 되면 더 글을 쓰고 싶다)
예수님께서도 “나는 하나님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하신다.
[마태복음 11:28-30]
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 나는 하나님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처음 이 구절을 읽었을 때 예수님께서 주님의 거룩한 멍에를 내 어깨에 메우시고 배우라는 줄로 알았다
“아! 이 귀하고 거룩하고 중요한 주님의 사명을 내 어깨에 메고 모든 것을 다 희생하며…“라고 생각했다.
참으로 자신이 없었다.
얼마나 우수운 일인가?
요즈음 생각해 보면 온유하신 주님께서 그 멍에를 직접 메시고
한쪽을 내가 메는 시늉을 하게 하시고 힘든 것은 다 주님께서 지시고
내 역량에 맞추어 아주 조금씩 지게 하시는 것이라 믿는다.
그래야 마음이 쉼을 얻지 옛날 짐 내려놓고 새 멍에 얹으면 어떻게 쉼을 얻나?
주님께서 다 지고 가시고 나는 그저 내 역량에 맞게 시늉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네가 나를 사랑하여 충성했노라”고 칭찬하실 것이다.
나 혼자서 낑낑대고 지고가게 하고 내버려 두시면
어떻게 주님께서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선언하시겠는가?
주님의 마음을 배우는 것이 온유함을 배우는 길이다.
주님의 마음을 배우는 것이 겸손함을 배우는 길이다.
마음의 쉼을 얻는 길이다.
주님께 나아 와야 한다.
어린이 찬송가에도 있다.
온유한 마음은 주님의 마음
동무들아 이 마음 어서 배워요
하나님이 제일로 사랑하는 맘
겸손한 마음은 주님의 마음
동무들아 이 마음 어서 배워요
하나님이 제일로 사랑하는 맘
아들은 키워본 아버지는 잘 안다.
자라는 어린 아들과 씨름을 하다가
아들이 힘을 쓰면 “아이쿠-” 하면서 아버지는 넘어간다.
넘어갈 때도 극적으로 넘어가면서 아들은 다치지 않게 기술적으로 넘어간다.
그리고는 “우리 아들 힘도 참 세지 아버지가 못 당하겠네“ 한다.
아들의 기분을 잘 봐서 어쩌다, 정말, 가끔 한 번 이긴다.
(너무 저주면 아들이 눈치 챌까봐)
온유의 한 모습이다.
나는 믿는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든지 우리에게 져 주시고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실 준비가 되어있으시다.
아버지가 자주 이기면 어린 아들은 기가 죽어 아버지와 놀기 싫다.
우리는 나보다 약한 사랑하는 상대에게 온유해진다.
지식, 소양의 교육에 있어서도 우리는
어린 아이에게는 어린 아이에게 맞게 가르치고
좀 공부한 학생에게는 또 그에 맞게 가르쳐야만 한다.
지적 훈련의 온유함이라고 할 수있다.
이것은 비교적 잘 되는 것 같다.
온유: 통제된 능력 Power Under Control 이다.
그런데
아이러니칼하게도 나의 이런 글은
보는 관점에 따라 온유함이 아니고
자기의 깨달은 것을 자랑하는 교만이 될 수도 있다.
누구에게는 유치한 자랑이 될 수도 있다.
인간 논리의 모순이며 약점이라고 생각한다.
또,
약자의 입장에서 힘든 일을 당할 때 온유는 나타나기 참 어렵다.
그럴 때에 사용되기는 어려운 말이라고 생각한다.
그럴 때는 겸손이라는 말이 맞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