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막 (임마누엘의 하나님)

(글 쓴 날: 2019/06/12)

[이사야 7: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출애굽기를 읽으며 주목하게된 것.
출애굽기는 홍해를 두고 둘로 나누어진다.

(1) 홍해 건너기까지: 애굽에서 탈출 과정
(2) 홍해 건넌 다음 : 율례의 제정과 성막 세우기

많은 사건, 기사가 있지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왜 그런 생각이 든 것일까?

(1) 홍해 건너기까지(1장 – 15장)
하나님께서
모세를 준비 시키시고,
애굽 왕 바로와 힘겨루기를 하셨고,
홍해를 건너게 하셨다.

(2) 홍해 건넌 다음 (16장 – 40장)
하나님께서
십계명과 율례를 주시고,
그 택한 백성 가운데 거하시려고 성막을 만들게 하시고,
앞서 가시며 그 택한 백성을 인도하셨다.

(이스라엘 속에 머무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

(임마누엘의 하나님)
출애굽기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함께하신다는 말씀으로 끝난다.
[출애굽기 40:38]
낮에는 여호와의 구름이 성막 위에 있고 밤에는 불이 그 구름 가운데 있음을
이스라엘의 온 족속이 그 모든 행하는 길에서 친히 보았더라

하나님께서는 행군할 때도 앞 서 가시었다.
[신명기 1:33]
그는 너희 앞서 행하시며 장막 칠 곳을 찾으시고
밤에는 불로, 낮에는 구름으로 너희의 행할 길을 지시하신 자니라

(앞서 가시는 하나님)
그리고 여호수아의 지휘로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간다.

출애굽에서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기까지의 이야기 중
애굽을 탈출한 이야기는 그렇게 많지 않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백성으로서 삶의 연단(?)에 관한 이야기가 훨씬 많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 중에 임마누엘로 함께 계시기 원하신 때문이다.

출애굽기 40장, 레위기 27장, 민수기 36장, 신명기 34장 모두에서 지루하도록
(성경 처음 읽을 때 참 지루했다. 레위기는 읽지 않고 건너뛰었다)
율법, 계명, 규례, 제사(속죄의 제사) 등등을 길게 쓰셨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과 교제하며 함께하기 위한 교훈과 훈련이다.

하나님께서 높은 하늘에서 이스라엘을 내려 보시며 모세를 통해 인도하신 것이 아니라
몸소 이스라엘과 함께 계시면서 함께 약속의 땅으로 가시기를 원하셨다는 말이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함께 계시기 위해 그 택하신 백성도
그에 걸맞게 거룩하도록 40여년간 끊임없이 격려하고 연단하셨다는 뜻이다.
이스라엘과 함께하시기를 그렇게도 원하신 하나님이시라는 말씀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속에 계시었다.
이스라엘 민족은 장막을 치고 있었고
하나님도 장막을 치고 이스라엘과 함께 계시었다.
하나님이 그 백성과 함께계신 천막, 그것이 성막이었다.
크신 하나님이 누추한 장막을 치고 이스라엘과 함께 계셨다는 것.
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 은혜인가?

그러나 그 40년간, 이스라엘은 사이사이, 시시때때로
하나님을 원망하고 죄를 범하고 하나님을 슬프시게 했다.
기회만 있으면 하나님을 원망하고 거역하고 죄를 지었다.
하나님은 거역하는 죄 된 이스라엘 백성은 모두 광야에 묻으시고
순종하는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시었다.

나는 이 출애굽기를 개인적으로 다음과 같이 이해한다.
(
그런데 이런 이해는 내가 싫어하는 우화적 해석이다
– Allegorical Interpretation –
그런데 이 시점에서 나는 그렇게 해석 할 수밖에 없다.
)

(1) 예수님 믿기 전 (홍해 건너기까지)

여러 과정을 거쳐서 주님께서는 나를 구원하시었다.
(믿을 때 감동은 없었어도)에 써 놓았다.

(믿을 때 감동은 없었어도)

그리고 주님의 주권적인 크신 사랑으로
누추한 장막과 같은 내 육체 속에 들어와 계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사도 베드로도 육체에 사는 것을 장막에 산다고 했을 것이다.
[베드로후서 1:13,14]
13 내가 이 장막에 있을 동안에 너희를 일깨워 생각하게 함이 옳은 줄로 여기노니
14 이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지시하신 것 같이 나도 이 장막을 벗어날 것이 임박한 줄을 앎이라

내속에 (어디인지 모르나) 들어오셨다.
주님의 은혜에 감사한다.

(2) 예수님 믿은 후 (홍해 건넌 다음)

50년이 흘렀다.
주님께서는
내 육신이라는 누추한 장막에 나와 함께 거하시어
임마누엘로 내게 거하시는 하나님이 되시었다.

그리고 끊임없이 나에게 거룩한 삶을 격려, 도전하신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을 거역한 이스라엘처럼
하나님을 거역한 적이,
미적미적 거린 적이
얼마나 많았을까?

성경을 읽으며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은 어찌 이렇게도 완악할까“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바로 하나님 앞에서 나의 모습이다.

“하나님 제게 신경 좀 더 써주시면 안됩니까?“ 하고 항의도 했다.
어려운 시절을 지나고 보니 어느 분의 말처럼
주님께서 나를 품에 안고 그 힘든 시절을 지나 오셨다.
“나처럼 하나님께 열심 있는 사람 많지 않을 걸” 하는 오만.
하나님과 사람 앞에 부정하고 부끄러운 실존이다.

나를 사랑하시고
피 흘려 돌아가시고
나를 구원하시고
내 속에 함께 계시는 주님께서
부정한 내 속에 함께 계시면서
얼마나 마음이 상하셨을까?
얼마나 나를 참고 계시는 것일까?

이런 시간이 50년을 흘러갔는데
앞으로 얼마나 더 남아 있을까?

아침에 기도하면서 (2019/6/8)
갑자기 왜 이 생각이 떠올랐을까?
하나님 앞에
죄송스럽고 부끄러운 자신을
어찌해 볼 능력도 없고
한심하고 무능해서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남이 볼까 소리 내어 울지 못했다.

(
주님 죄송합니다.
용서하여주십시오
이렇게 말씀드리고도 뒤 돌아서면
순간순간 원래대로 돌아가는
저는 어찌 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주님께서 허락하시는 깨달음이 많아도
순종과 실천은 턱없이 모자라는 존재입니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위선자로 존재하는 거지요.
그렇다고 주님을 더 알아 가기를 그만 두고 싶은 생각도 없습니다.
어떻게 할 수 없는 저 자신입니다.
주님 도와주세요.
)

내 안에 주님께서 편히 계시도록
내 안에 주님께서 계시는 성막이 이루어지도록
나는 거룩함으로 매일 나아가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물론 자신 없다.
그냥
힘쓸 뿐이라 생각한다.
우리 주님께서 은혜를 더하시기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중 거역하는 백성을 제거하셨듯이
내게서 죄 된 성품을 점점 제거하시고
하나님 자녀다운 존재가 되게 해주시리라 믿는다.

주기도문의 한 구절이 생각난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내 속에 거룩함을 이루어 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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