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쓴 날: 2019.06.24)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로 시작하는 주 기도문
[마태복음 6:9-13]
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10.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11.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이 기도를 3년간 적어도 150번은 한 것 같다.
주일날 예배 때마다 한번씩 (1967 – 1969)
고등학교 시절이었다.
그런데도
하나님이 내 아버지라고 생각한 적 별로 없었다
아무 생각 없이 따라 했다고 하는 게 맞다
언젠가 누가 내게 “하나님이 계시다고 믿느냐” 물었다.
계신다고 생각했고 계실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왜 그랬을까?
3년을 그렇게 하고, 1970년 3월 14일
누군가가 내가 하나님을 내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다고 말해 주었고
(교회에서 다들 흔히 하는 말로 복음을 전해 주었다)
[요한복음 1:12-13]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예수님을 믿어 나의 (마음)속에 영접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리를 하나님께서 내게 주셨고
그것은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하나님의 방법이라는 성경의 선언이었다.
3년간 교회 다니며 대략 150번 아무 생각 없이 외웠던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가 번쩍하며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예수 그리스도. 믿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어 주시겠다는 데…
왜 마다할 것인가?
그래서
그날, 나는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
(너무 쉽게 믿었나? 너무 단순, 순진했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애굽 노예생활에서 구원하실 때
열 가지 재앙으로 애굽 왕 바로와 힘겨루기를 하셨다.
그러나 그것은 바로를 징계하기 위함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하나님께서 크신 하나님이심을 깨닫게 하시기 위함이었다고 생각한다.
(출애굽기 7 – 11장)
지금 생각하면
그 3년간 주기도문을 외울 때마다 예수님께서는
나의 마음을 두드리시며
[요한계시록 3: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세상 권세 잡은 사탄과 나를 두고 힘겨루기를 하셨다고 생각한다.
물론 내가 어쩔 수 없이 당장 믿게 하실 수도 있으셨겠지만
내가 예수님을 내 구세주로 마음으로 믿게 하시려고
씨름을 하며 기다리셨다고 믿는다.
주님의 은혜에 감사한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 얼마나 숨이 막히고, 가슴 벅차 오르는
아름다운 말인가?
이 말을 내가 할 수 있다니
얼마나 대단한 은혜요 축복인가?
그런데
요즘 교회에서는 주기도문 정기적으로 하지 않는 것 같다.
왜, 이 좋은 주기도문을 안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참 아쉽다.
뭐 교회에도 유행이란 것이 있을 터이니까
그런가 보다 생각하기는 하지만…
이 좋은 주기도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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