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학교 어린이가 선생님에게 질문 했다.
(어린이): “선생님, 기도할 때 껌 씹어도 돼요?”
(선생님): “껌 씹으면서 기도하는 건 좋아 그러나 기도하면서 껌 씹는 건 나빠”
무엇이 우선인가 하는 동기는 행위 자체보다 중요하다.
그래나…
행위만으로 본질을 규정하면 율법주의 형식주의로 빠지고
눈에 보이지 않는 동기만 가지고 실천을 가볍게 여기면 위선과 방종의 죄에 빠진다.
나(인간)의 본성은 한편 순진하고 다른 한편 간교하다.
이중성을 띄는 때가 많다.
이 예에서 어린 아이마저도 그렇다.
(정말로 궁금해서 물어 보았을 것이다)
성경은 시편에서 말한다.
우리(내)가 꾀로 교묘하게 하나님을 거역한다고…
겉으로는 순종하는 척하나 사실은 하나님을 거역한다는 말이다.
(시편 106:43)
(개역한글) 여호와께서 여러 번 저희를 건지시나 저희가 꾀로 거역하며 자기 죄악으로 인하여 낮아짐을 당하였도다
(개역개정) 여호와께서 여러 번 그들을 건지시나 그들은 교묘하게 거역하며 자기 죄악으로 말미암아 낮아짐을 당하였도다
이래저래 약한 존재일 수밖에 없는 우리(나)는 하나님께 기도할 수 밖에 없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 라고… (마태복음 6:13)
주님께서 지켜주지 아니하시면
나(우리)는 죄와 위선 가운데 살 수 밖에 없는 존재다.
또, 내 죄와 위선을 하나님께 책임을 돌리는 것은 궤변이며 논리의 오류다.
(우리 속에는 논리의 오류가 참 많다)
선한 동기와 선힌 행실은 둘 다 중요하다.
동기가 우선적으로 중요하지만 행실이 뒷받침 되지 않으면
마음속의 동기는 강하게 의심을 받는다
그리고 타인으로부터 비판의 대상이 된다.
그래서 야고보서는
행동, 실천으로 마음속의 믿음을 보이라고 강하게 주장하고 있다.
속에 있는 믿음, 확신은 실천이라는 몸을 입어야만 비로소 보이는 것이다.
(쉬운 일을 아니다)
반면에 믿음이 없어도 (일정 기간 동안) 믿음의 행동을 하는 경우도 우리는 많이 본다.
이것은 불순한 목적을 감춘 위선인 경우가 아주 많다.
그 불순한 목적을 이루면 즉시 원래의 악한 모습을 들어 낸다.
혹은,
소신이 없이 강한 도덕적인 의무감에서 나온 행동이어서 본인이 매우 괴롭다.
그래서 얼마 가지 못하여 지치고 낙심하여 옛날로 돌아가기 매우 쉽다.
진지한 그리스도인은 사도 바울의 고뇌가 자기의 고뇌임을 경험할 것이다.
(로마서 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아- 복잡하다.
그래도 진지한 순종과 실천은 있는 힘을 다해 힘을 써야 할 것이다.
(히브리서 12:4)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 까지는 대항치 아니하고
나의 결심을 나도 믿지 못하는
이래저래 약한 존재일 수밖에 없는 나는
(마태복음 6:13)을 의지하여
하나님께 기도할 수 밖에 없다.
“주님,
언제든지 유혹에 빠질 준비기 되어있는 연약한 저를
위선의 죄에서 지켜 주시오며,
순수한 동기로 하나님께 순종하게 도와 주시고,
자신을 속이지 말게 도와 주시고,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소서”
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