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아진 다는 것은 하향평준화 그 이상이다.
어린 아기를 기르는 부모는 똑 같이 어린 아기가 되어서
아기 앞에서
“얼렐레” 하면서 재롱을 떤다.
말투도 어린애의 말투가 된다.
“아이구 우리 착한 애기 누가 그랬쪄요?”
“엄마가 호- 해줄께요” 이렇다.
어른끼리 그렇게 하면 웃기는 코메디다.
(
나도 우리 애들 어렸을 때 회사를 다녀오면
두 아이 손을 붙들고
“푸른 잔디 풀밭에 봄바람은 불고…”
나물 캐는 처녀 노래를 부르며
펄쩍펄쩍 뛰며 아이들과 춤을 추었다.
)
부부 중 한편이 병이 들면 (정신병 같은 것 까지도)
부부의 다른 편도 함께 그 병이 든 것처럼 병든 상태가 된다.
그래야 그를 이해하기 때문인 듯하다.
자녀 중 누가 지적장애 같은 힘든 병을 갖고 살면
온 가족은 어떤 면에서 그 병을 같이 앓는다.
그를 사랑해서 그를 이해하려다 보니
자연히 함께 병을 앓게 된다고 한다.
사랑에서 출발한 자발적인 낮아짐, 하향평준화다.
그러나 …
어떤 다른 이유가 있어 겸손하려 노력하면 가식이 된다.
본인이 너무 힘겹다.
겸손을 위해 겸손해 지는 것은 참 어렵다.
언젠가는 내적인 불만이 속에서 폭발하고야 말 것이다.
“왜? 나를 알아주지 않는 거냐?“ 하고…
그래서 가수 조영남은…
“나보다도 잘난 사람 또 있을까? 겸손은 힘들어”라고 노래했다.
실제로 사람에게 종놈 취급을 당하면 매우 분개한다.
주님의 종(일군)을 지향하는 사람의 마음속에
“ 나는 존경(대접)을 받아야 할 사람이다“ 라는 생각이 들면 그건 사탄의 음성이다.
세상 지도자, 왕은
자기의 권위, 존경 받음, 영광 받을 위치임을 주장한다.
사탄도 예수님에게 스스로 영광을 취하라고 유혹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하면서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스스로 증명하라고 요구한다.
(마태복음 4장을 읽어 보면)
악한 무리들도 예수님게 선지자임을 스스로 증명하라고 조롱했다.
(마태복음 26:68)
가로되 그리스도야 우리에게 선지자 노릇을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하더라
자기의 위치, 권위를 스스로 높이려 하는 것은 마귀의 방법이다.
(이사야 4:13)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좌정하리라
(
남편이 교수인 누가 친구 앞에서 자기 남편을
“우리 교수님, 교수님”이라고 부르면 친구 마음은 불편할 것이다.
목사가 교인 앞에서 사적으로 부인을 부를 때 “사모” 하고 부르거나
그 반대의 경우를 보아도 마음이 불편할 것이다,
스스로 존경(영광)을 주고받는 태도라고 무의식적으로 인지하는 것이다.
내가 이해하기로는 서로서로 영광을 주고받는 호칭을 쓰는 경우는
절대 군주 왕과 왕비가 서로서로 “상감마마”, “중전”하고 부르는 경우 밖에 없다.
이것은 용무늬 옷(곤룡포: 사탄의 상징?)을 입은 세상 왕이 하는 태도가 아닌가?
한편으로는 안됐다.
“스스로 생각해도 존경받지 못 할까 느껴서 서로를 높여주나?“ 하고 말이다.
“여보”, “당신”, “누구 아빠, 엄마”, “자기야”, “Honey”, “Darling” 등, 좋은 호칭
다 놔두고 모두 들으라는 듯이 그렇게 부르나?
내가 너무 까칠 한가?
“너도 존경 받고 싶어 열등감 자격지심으로 그러지?” 라고 한다면
나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 없기는 하다.
)
물론 자녀들이 부모를 존경하지 않으면 부모는 참 슬프다.
그러나 부모는 갓난아기에게 부모를 존경해 달라고 결코 요구하지 않는다.
그저 튼튼하게 자라 주기만하면 기쁘다.
자기의 영광을 챙기려는 것은 스스로 높아지려는 것이며,
불신 세상의 방식이며 마귀의 방법이다.
우리 주 예수님의 방법이 아니다.
주님의 종이 되어 주님을 닮겠다고 하며
세상의 마귀의 방법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다.
참으로 아이러니칼한 태도이다.
주님은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하나님 영광은 구하지 않는다” 하신다.
(요한복음 5:44)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
그러나…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나를 그렇게 사랑하시어서
진정한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셨고
사람으로 성장하고 사람으로 사시었다.
사랑에서 시작된 결코 이해할 수 없는 미스테리이다.
하나님의 위치에서 사람으로 낮아진 하향평준화이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감으로서만 겸손해 질 수 있다.
주님의 마음을 닮고자 마음에 힘써야 하겠다.
수시로 불끈 불끈 치솟는 자아(성질, 옛사람)를 다스리면서…
그게 혼자 있을 때는 생각뿐이기 때문에 참 잘 된다.
그러나 사람과 사람이 부딪치면 그렇지 못한 인간성의 민낯이 즉시 나타난다.
그래서 내가 만나는 분들, 자주 뵙는 분일 수록 귀한 하나님의 사자이시다.
나의 내면의 민낯을 돌아보고, 주님을 생각하고, 주님과 조우하게 하시는 분들이다.
매일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야 하는 마눌님, 참 귀한 분이시다.
(마눌을 이렇게 높여 부르는 내 논리의 모순을 부디 이해하고 용서해 주시길)
진실한 주님의 일군은 항상 부족했다.
그래도 지금은 낮아지는 주님의 종이 더욱 필요한 때.
주님이 사랑하시는 영혼을 구하고 기르고자 하는 사람은,
주님의 종(일군)을 지향하는 사람은,
주님의 겸손(하향평준화)를 몸에 익혀야한다.
그리고 나는 목회자는 물론이거니와
스스로 믿음이 성장했다 여기는 그리스도인은
나를 포함하여, 누구나 하향평준화의, 어린 영혼을 길러내는
주님의 종이 되어야한다고 믿는다.
엄마 아빠도 자녀(한 생명)을 키우기 위해 “얼렐레”하고 바보가 된다.
가축(양)을 처서 부농이 되려는 자는 숫자 불리기를 힘쓴다.
[빌 2:5-8]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복음송가에도 그런 가사가 있다.
주님 오신 참뜻을 알 수 있나?
고난의 십자가 어이 지셨나?
누구위해 보혈을 흘리셨는가?
갈보리 산 고난은 누굴 위한 것인가?
백만 년이 지나도 알 수 없네
너와 나를 위해 죽은 십자가의 욕된 고통을….
(
진정한 겸손은 우리 주님께 해당되는 말이고
그 주님의 겸손을 본받아
낮아지는 주님의 종이 절실히 필요한 때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