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성경의 문맥)

(마태복음 6: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이 마태복음 6:25 의 성경 말씀을…
불량 음식이 참 많은 데, 무엇을 먹을지 마실지 염려 말라고 주님이 말씀하셨다고
이해한 분이 있다 (미국 사시는 서양 분)
제자들의 “바리새인의 누룩”과 매우 비슷한 해석을 하셨다.

없어서 못 먹던 시절을 지나 온 나의 세대
625 동란을 거쳐 온 내 세대의 한국인은 상상도 못할 기막힌 이해다.
먹을 것이 없어 못 먹었다고 하면 요즘 미국, 한국 아이들이 이해 못할 때가 왔다.

나 어렸을 때, 대한민국을 이승만(대통령)이 통치하던 때,
대통령 전용 이발사가 그의 머리를 깎고 있었다.
이승만: 자네 왜 그리 말랐나?
이발사: 쌀이 없어 못 먹어 그렇습니다. 각하.
대통령: 쌀이 없으면 계란이나 밀가루를 먹으면 되잖아?
이발사: ???
이런 웃기는 이야기야 있었다.
먹을 것 걱정 없는 사람은 없어서 못 먹는 사람 사정을 모른다는 말이다.

그런데 현대는 …

불량식품,
GMO 유전자 변형 식품,
환경 오염 식품,
방사능 오염 식품,
미세 플라스틱에 오염 해산물,
오염된 물
등등이
우리의 먹거리에 대해 염려 하게한다.

그러니까
잘사는 나라(미국?) 사는 사람은 건강 해치는 음식물을 걱정하고
못사는 나라(아프리카?) 사는 사람은 그것도 없어서 못 먹는다.

그래서 그 분은 마태복음 6:25을 그렇게 이해했을 것이다.
햄버거, 콜라, 사이다, 초콜릿, 아이스크림 등등…
그 많은 음식들이 모두 건강에 나빠 장수에 지장이 있다니 얼마나 염려가 되겠는가?

그러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염려하지 말라”하신 말씀이 눈에 확 들어 왔을 것이다.
“아 ! 주님께서 돌보아 주시니 안심하고 먹자”라고 …
똑 같은 성경을 가지고도 없어서 못 먹고 살아 본 나와는 이해의 방향이 전혀 다른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이해이기는 하다.
그러나 요즈음 절실한 사항이니 그럴 수도 있지 않은가?

우리는
똑 같은 성경 구절을,
똑 같은 시간에,
똑 같은 장소에서,
똑 같이 보아도
자기 관심, 선입관, 편견 이런 것들에 의하여 변형(BIAS)된 이해를 할 수가 있다.

어디 이분만 그렇겠는가?
우리 모두는 조금씩 자기의 입장에 따라 이해하는 바가 다르다.
그래서 남의 말, 글을 이해하려면 그의 입장에서 읽고 들어야 바른 이해가 된다.

그 말씀을 하신 주님께서 어떤 때, 어떤 마음으로 말하셨나 생각해야 한다.
당시에 그 말을 듣는 사람들의 환경을 생각하고 읽어야 바른 이해가 된다.
그 당시의 역사, 사회 공부는 성경의 이해에 중요하겠지만,
이 경우에는 그다지 필요하지 않다.

문맥을 슬쩍 살펴보아도 당시의 상황을 거의 알 수가 있다.
마태복음 6장을 끝가지 만 읽어 보아도 알 수가 있다.
로마 군인들이 사형수 예수님의 옷을 제비 뽑아 나눌 정도로 가난한 시대인 것을 알 수 있다.

성경의 문맥을 따라 성경을 이해하는 것, 참 중요하다.

물론 이분처럼 성경을 이해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자기 관심, 선입관, 편견, 주장, 교리 등등에 의하여 변형하여 이해의 방향을 결정 하고
그 이해를 연상 작용의 오류에 의하여 깊이 있게 다른 방향으로 전개시키고
(“원숭이 xxx는 빨개“ 같은 연상 논리의 오류)
이것이 올바른 이해이며 해석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옳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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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어서

에베소서 2:8의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는 내가 언제 어떻게 예수님을 믿을 것 까지도 다 알고 정해 놓으셨을 테니까
“그 믿음도 하나님의 주권적인 예정“ 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교리에 심취하여 성경의 기록을 무시하고 연상을 잘못 전개한 오류이다.
그래서 나는 성경의 다른 곳의 기록까지 무시하는 극단적인 예정론을 반대한다.
그 반대의 주장도 있을 수 있다.
(
나는 신학을 공부한 사람이 아니다.
신학에서 무엇이라 정확하게 주장하는 지 자세히 모른다.
그러나
열심인 분들이 “예정론”이라는 용어를 가지고
그와 같이 주장하는 것은 종종 들어서
그 들은 것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그들의 주장이 어느 정도 변형이 되었다면
전문적으로 공부한(목사?)들이 옳게 가르쳐 주어야 할 것이다.

신학자들은 이 경우 믿을 바가 못 된다는 것이 내 의견이다.
자기의 학문의 주장이 우선이기 때문에
계속 그것을 주장할 것이기 때문이다.
)

마음속에 “성경에 기록된 대로 변형 없이 이해 한다“ 를 우선 원칙으로 정해 놓는 것이 좋다.
성경 차근차근 읽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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