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몸의 한 부분과 같은
어떻게 해도 관계를 끊을 수 없는
애틋하게 가슴 저리도록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데
나 밖에는 그에게 무엇을 어떻게 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없다고 믿는데
내가 그를 위하여 무엇인가를 해야만 하는데
나는 무기력하여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때가 많이 있다.
모세의 엄마 요게벳의 입장이 그러했다.
(1)
우리 교회 장애아교실(사랑의 교실)에서는
뇌성마비, 발달장애, 자폐 등 선천성 장애아를 주일마다 돌본다.
예배 시간과 점심 식사 교제 시간에 부모들이 편한 마음으로 예배에 참석하고
서로 식사를 하며 교제를 할 수 있게 하기 위한 잠깐 동안의 봉사이다.
교사로 4년간 일주일에 한 번씩 교사를 했다.
(지금은 나이가 들어 그만 두었다)
선천적인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아이
사람으로서는 부모 외에는 감당해줄 사람이 없다고 느낀다.
그 부모도 능력이 매우 제한된 인간이라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다.
이 아이를 평생 책임질 사람은 부모 자신 밖에 없다고 느끼고 있다.
그리고 그 부모도 점점 늙어간다.
그 부모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하나님은 우리가 어떻게 하기를 원하시는가?
(예배 시간 장애 청년을 돌볼 때)
(2)
불치의 병 혹은 치매 같은 병을 앓고 있는 부부 중
한편을 돌보고 있는 다른 한편.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지금 살고 있는 우리 집을 사서 이사 들어왔을 때
문이 집안에서 잠그게 되어있는 것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했다.
할머니가 치매이어서 밖으로 마음대로 나가지 못하게 하려고
할아버지가 집 안에서도 열쇠로 문을 열어야만 나갈 수 있게 한 것이다.
할머니는 요양원에서 먼저 돌아가셨고
그 할아버지도 2019년 12월에 90세로 돌아가셨다고 한다.
이 할아버지가 할머니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이었을까?
(3)
똑똑하게 잘 자라던 아들이
사춘기를 지나면서 조울증이 발작해서
부모, 엄마를 가슴 아프게 하고 행패를 부린다.
물론 저는 발작할 때에 그게 행패인지도 모른다.
발작이 끝나면 언제 그랬는가 하는 행동을 한다.
이 부모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4)
사춘기 딸이 엄마 말을 듣지 않고 속을 썩이던 그 때
“시집가서 너 같은 딸을 낳아서 속 좀 썩어 봐라”
생각 했는데…
그 딸이 시집을 가서 참으로 까다로운 손녀를 낳았다.
사위는 손녀 아기가 태어났을 때
“ㅇㅇ아 네가 할머니 원수 갚아드려라”농담 했다.
(
말이 씨가 된다는 말이 있다.
말은 조심해서 해야 한다.
)
그런데…
손녀 아이가 딸 아이 몸도 마음도 고생 시키는 것을 보고
그 손녀 아이도 사춘기에 접어들어 또 감정 씨름도 더 힘들고
“거봐라 너 엄마 속을 썩이더니 너도 이제 그 심정 알겠지?”
마음속이 시원할까? 결코 아니다.
가슴이 더욱 답답하고 우울하고 슬프다.
고통에 관련된 사람의 숫자가, 관계의 수가,
관계의 복잡성이 늘어났고
가슴속의 고통도 복잡 미묘하게 늘어났다.
누구의 잘못도 아닌 채 딸도 손녀도 가엽다.
가슴 속이 먹먹하다.
“그것 봐라” 같은 말은 아예 꺼내지도 못한다.
이제는 엄마 된 딸의 가슴 속을 헤집어 놓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딸, 그 손녀를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이 정말로 아무것도 없다.
무능을 뼈저리게 느낀다.
이 엄마이며 할머니가 딸과 손녀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5)
자식이 잘난 것은 내가 잘난 것 보다 훨씬 더 기쁘고 자랑스럽다.
반대로 자식이 못나고 속을 썩이면 어디다 하소연도 못한다.
대한민국의 전 대통령 김영삼, 김대중 …
그 아들들이 아버지를 믿고 권력형 범죄를 해서 대 국민 사과 방송을 했다.
아들이 조금이라도 형을 덜 받거나 대충 지나가게 하려고 수치를 무릅썼다.
대통령이면 무슨 소용인가 아들이 범죄자면 더욱 수치스럽다.
(그 아들 요즘도 이상한 말 하는 것 같은데)
장성한 자식이 쉬운 말로 정신 못 차리고 속을 썩이면
자식 농사가 인생의 성적표라고 하는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참 가슴이 답답하다.
부모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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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그럴 때에 모세의 엄마
요게벳이 했던 기도를 하게 되지 않을까?
우리에게 아주 조금의 능력이라도 있으면
그것을 사용하여 어려움을 극복하려고 한다.
자기의 그 미미한 능력으로 어찌 어찌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능력을 자랑하지 말고
하나님 아는 것을 자랑하라고 하신다.
하나님 아는 것 만 자랑하고 의지하라고 하신다.
(예레미야 9:23,24)
23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 지혜를 자랑치 말라
용사는 그 용맹을 자랑치 말라
부자는 그 부함을 자랑치 말라
24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찌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땅에 행하는 자인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미미한 우리의 능력, 그것도 없다고 느낄 때,
우리는 내가 뭔 죄가 많아서 이렇게 괴로운가 하고 한탄을 한다.
욥이 고통 속에서 그랬다.
(욥기 13:23)
나의 불법과 죄가 얼마나 많으니이까 나의 허물과 죄를 내게 알게 하옵소서
제자들은 날 때부터 소경인 사람을 보고 누구의 죄 때문이냐고 주님께 물었다.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렇다고 말씀하시었다.
(요한복음 9:1-3)
1 예수께서 길 가실 때에 날 때부터 소경 된 사람을 보신지라
2 제자들이 물어 가로되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
3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그런데 믿음이 없게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는 주님의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나는, 우리는 이렇게 마음속으로 외친다.
하나님 그게, 왜, 왜, 왜? 하필이면 저입니까?
Why Me! Why Me Lord.
Kris Kristofferson은 은혜를 형편없는 제게 주님께서,
왜 이렇게 은혜를 베푸시냐고,
왜 저냐고 노래했지만
Kris Kristofferson – Why me Lord
https://www.youtube.com/watch?v=g2u_rEcWW8M
그 반대에 처한 우리는
왜?, 제가 75억 인구 중에서 제가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하느냐고 외친다. …
자식은 어려서 품에 있을 때가 내 자식이고
부모에게 기쁨과 즐거움이다.
(그때 부모에게 평생의 효도를 다 했다)
장성하여 스스로 살 수 있게 독립하면 그 때는 남이 된다.
자립하여 살 수 없는 매우 부족한 자녀이면 내 앞에 자식으로 남는다.
그리고 가슴을 아프게 한다.
그런 자식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자기를 이해해 주고 자기의 편이 될 사람은 세상에 오직 부모뿐인데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다)
그렇다고 말하기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고
그냥 부모에게 감정을 드러내며 해대게 마련이다.
이 자식이 나의 자식임을 확실하게 증명하는 순간이다.
그럴 때에 부모는 가슴이 찢어진다.
자식은 그런 것이 머리속에 생각도 나지 않는다.
(
그것을 생각하는 자녀는 매우 훌륭한 자녀이다.
하기는 나도 부모님께 잘해 드린 것이 없는 지녀이다.
)
그런 마음의 아픔 속에서 부모는 생각한다.
우리 주님 앞에서 내가 (인류가) 그렇지 아니한가?
그래서 주님은 그렇게 기도하신 것이 아닌가?
(누가복음 23:34)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십자가위에서 예수님이 하신 마지막 기도 중 하나.
내게 아무 일이 없었을 때에는 그저 머릿속으로
“참 예수님의 이해심 사랑은 헤아릴 수 없이 크다”라고 생각했던 주님의 기도.
나에게는 너무 벅찬 기도이기는 하지만 이해를 할 수 있을 것만 같기도 하다.
생각하면 할수록 가슴이 답답해 오는 기도.
그런데도 그 예수님의 심정을 몰랐었다면 조금 더 맘 편했을 것만 같은 기도이다.
(오! 주님 저는 그런 것 몰라도 괜찮은데요)
부모에게 잘 하는 잘 난 자식을 둔 부모는
예수님의 이런 심정을 이해 할 수나 있을까? 하고 삐뚤어진 생각한다.
생각한다.
그래서 자식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허락하신 은혜요 축복이다.
자식이 문자 그대로 효자 효녀이고 세상에서도 잘 되면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게 되고
그렇지 못한 자식을 둔 부모는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고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더욱 가까이 나아가게 된다.
(야고보서 5:16)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찌니라.
그런데
하나님 하나님께서 절대 주권자이시고
하나님의 뜻이 선하고 아름답다는 것 저도 인정합니다.
하나님 그런데 그게 왜, 하필이면 저 입니까?
저도 남처럼 좀, 그렇게 잘해 주시면 안 될까요?
하나님
하나님께서 이 아이 이런 아이를
세상에 내어 보내실 때에
믿고 맡길 사람이 저희 밖에 없어서
저희를 믿어 주셔서
이 자식을 저에게 보내 맡겨 주셨다고 믿고싶습니다.
그런데 그게 하필이면 저일까요?
하나님
하나님께서 이 남편 이 아내를
짝 지워 주실 때에
믿을 사람이 딱 저라서
저를 믿어 주셔서
이 남편을 이 아내를 제게 보내 주셨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그게 하필이면 저일까요?
이런 질문이 나오는 분도 있을 수 있다.
내가 그렇게 기도해도
상대방은
자식은, 남편은, 아내는
나와 얽혀서 나에게 마음의 고통과 기쁨이 되는 그 상대는
전혀 그것을 모른다.
또한 나도 나와 매우 가까운 어느 누구에게
그런 사람이었거나
그런 사람일 것임이 확실하다.
(
나도 그걸 모를 것이다.
제가 잘 난 줄 알지만
그것이 인간이다.
)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면
나를 포함한 인간이 싫고 미워지기도 하면서
주님의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라는 기도가 이해가 되는 순간이다.
우리 주님은 우리의 이런 연약한 성정을 너무나도 잘 알고 계신다.
(히브리서 4:15,16)
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16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주님께 가지고 나가는 수밖에 다른 수가 없다.
(찬송: 내모든 시험 무거운 짐을)
https://www.youtube.com/watch?v=LihwkQKQ-VI
상처는 큰 상처도 아프고 작은 상처도 아프다.
아픈 것은 크고 작고 구분 없이 아주 아프다.
가끔은 존재하는 자체만도 힘에 겨운 때가있다.
어려서 자라날 때는 존재하기 위하여
새로운 것을 반복에 반복을 하여 익혔고
그래서 점점 더 쉬워졌는데
늙어서는 이미 익숙한 것들을 잊지 않으려고
반복에 반복을 하여 해내려고 힘쓰지만 점점 더 쉽지가 않다.
(늙어보면 안다)
냉혈동물 파충류는 환경이 힘들어지면
모든 기관의 행동을 멈추고 가사상태에 들어가
봄이 오기를 기다린다.
사막에 사는 어떤 개구리 종류는
몇 년 몇 십 년에 한번 올까말까 한 비를 기다리며
사막의 모래 속에 웅크리고 죽은 듯 있기도 한다.
나도 그럴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한다.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은 생각이지만
결코 현실에서 도피할 수 없고
견디어낼 수밖에 다른 선택은 없다.
그래서 이도 저도 할 수가 없을 때는
“차라리 죽어 버렸으면…” 하고 생각한다.
욥도 그랬고,
모세도 그랬고,
요나도 그랬고,
엘리야도 그랬다.
각각의 사정은 달랐지만 다들 죽기를 원했었다.
(욥기 6:9)
이는 곧 나를 멸하시기를 기뻐하사 그 손을 들어 나를 끊으실 것이라
(민수기 11:15)
주께서 내게 이같이 행하실진대 구하옵나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즉시 나를 죽여 나로 나의 곤고함을 보지 않게 하옵소서
(요나 4:3)
여호와여 원컨대 이제 내 생명을 취하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열왕기상 19:4)
스스로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행하고 한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
이 위대한 믿음의 위인들이 그러셨는데
나 같은 소인배야 삶의 끈을 놓고 싶을 때가 얼마나 많겠는가?
이 누추한 육신의 장막에서
우리의 존재가 힘겨워지는 것은
영원한 하나님나라를 사모하라고 그렇게 허락하신 것이 아니신지?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우리의 존재는 얼마나 비참할 것인가?
우리의 주님이 계시지 않으시면 우리의 존재는 얼마나 비참할 것인가?
(고린도전서 15:19)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 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공연히 푸념을 하는 순간이다.
모세의 엄마 요게벳은
갈대 상자를 준비하고
거기에 역청과 나무진을 발라 물이 새지 않게 했다.
그것은 사랑하는 아기를 자기로부터 떠나보내기 위한 준비였다.
갈대 상자의 구멍 하나하나를 역청과 나무진으로 메꿀 때
엄마 마음은 칼로 도려내는 듯 아팠을 것이다.
아가를 떠나보내는 준비를 하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자신이 얼마나 비참했을까?
우리에게 가슴 아픈 선택을 하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전혀 없을 때가 있다.
그것조차 할 수 없어서 그냥 멍하니 있는 때도 있다.
그 때에 우리는 우리 자신이
무능하고 무책임하고 한없이 비참하게 느껴질 것이다.
다른 부모는 그렇지 않을 텐데
내가 못나고 모자라고 능력이 없어서
내가 돈이 조금만 더 있었더라면 …
이렇게도 내 아이를 어떻게 할 수가 없다니…
그때 우리는
모세의 엄마 요게벳처럼
우리 생명의 주인이시며
생사화복의 주관자이신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마음으로부터 부르며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에 맡기는 기도를 하지 않겠는가?
그래도 우리의 마음속에는
기쁨이 아닌 찢어지는 슬픔이 가득하게 될 것이다.
효자(?)를 둔 엄마,
효자(?)를 둔 부모만이 누릴 수 있는 슬픔이며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축복(?)일 것이다.
나 같은 형편없는 인간이
이 자녀가 없었다면
어떻게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그 찢어지는 마음과
하나님의 애타하시는 심정을
머리 털끝만큼이라도 짐작이나 할 수 있겠는가?
(누가복음 23:34)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그것이 은혜라고 머릿속으로 생각하면서도
하나님,
그게 왜 하필이면 저 입니까?
그렇게 하시지 말고 달리 사랑해 주시면 안 될까요?
저 같은 것을 그렇게 믿어 주지 않으셔도 되는데요.
라고 투정하는 것이 나의 마음이기도 하다.
성령의 역사와 은혜가 넘치는(?) 그런 내용을 쓰고 싶지만
하나님 앞에서 나(우리)의 민낯 실존을 외면하기도 어렵다.
그리고
믿음의 결단과 실천이라는 답을 말하는 것이 아닌
답답한 문제만 제기하고 푸념을 하고 있다.
이런 경우
우리는 사방이 둘러싸여 막혀있고
위, 하늘로만 열려있다.
하나님께 기도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효자(?) 효녀(?)를 둔 부모들께
요게벳의 후예인 엄마들께
주님의
위로와 소망과 평안이 함께하시며
우리 주님이 피할 그늘이 되어주시고
그 믿음을 굳게 해주시고
낙심하지 말게 하시오며
피곤하여 지친 영과 육에
버틸 수 있는 힘을 주시오며
결국에는 우리 주님을
기쁨으로 찬양할 수 있도록
지속적인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를
우리 주님께 간구한다.
(야고보서 5:13)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찌니라
또,
자녀로 인하여 즐거워하는
특별히 복 받은 부모들의 말과 삶에
찬송이 늘 넘쳐나기를…
(문제없는 자녀를 둔 부모는 이 심정 모르시리라)
(찬송: 주만 바라볼찌라)
I don’t think the title of your article matches the content lol. Just kidding, mainly because I had some doubts after reading the artic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