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생각들
(설교)
돈 주고 영화관에 갔는데 영화가 재미가 없으면
“에이! 돈만 버렸다” 라고 하며 나온다.
월급 받으며 일을 하면 재미없고 욕을 먹어도 참고 다닌다.
직장 다닐 때 안 먹어도 될 욕을 많이 먹었다.
월급에는 감정 타격에 대한 보상도 들어있다고 나도 모르게 생각한다.
추억의 길거리 약장수, 만병통치약, 가짜 정력제, 뱀 장수.
밀가루를 반죽해 만든 가짜 약을 팔기 위해 여러 가지 퍼포먼스를 한다.
구경군은 박수치며 좋아하고 할아버지는 가짜 약을 사가시고
그 가짜 약 집에 가지고 가서 먹지도 않으면서 장사꾼을 욕하지 않는다
길거리에서 재미있는 구경을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교회 예배와 설교가 혹시나, 그렇게 인식되는 것은 아닌지?
다양하고 재미있고 즐겁고 … 그래야 된다고,
Program이 다채롭고 좋아야 된다고,
매번 새롭고 영적으로 보다 나은 영의 양식을 먹여 주어야 하고… 등등
목사는 고심하고 교인은 기대하는 것은 아닌지?
내가 어렸을 때, 가난하던 625 전쟁 이후의 그 때
우리 어머니께서 밥을 해 주시는 데
어제는 김치찌개 오늘은 된장 찌기 내일은 칼국수 모레는 시래기죽
7남매가 옹기종기 모여 먹었던 밥상.
그저 먹을 수만 있으면 좋았다.
(
그 때는 동요도 먹는 노래가 참 많았다.
동무들아 나오라 봄맞이가자…
달래 냉이 씀바귀 모두 캐보자
종달이도 봄이라 노래 부른다
긴긴 겨울을 굶어 지내다 나물 캐어 먹는 노래다.
산 골짝 양지에도 봄이 왔다고
민들레 예쁜 꽃이 피었습니다.
나 먹던 점심밥에 피는 민들레
또 먹는 노래…
산골짝에 다람쥐 아기 다람쥐
도토리 점심 가지고 원족을 간다
또 먹는 노래
먹을 것이 귀했던 그시절…
이런 동요 아는 사람 드물 것이다.
)
하루는 된장찌개를 큰 냄비에 끓여 내셨는데
그 속에 고기가 한 덩어리가 있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남 보기 전에 잽싸게 건저 먹었다.
그런데 너무나 짜고 써서 한참 캑캑거렸다.
고기 구경을 못해서 고기와 된장 덩어리를 구별 못했던 것이다.
어처구니없지만 재미있는 추억으로 기억한다.
가난 속에서 어머님이 가슴 졸이며 마련하신 끼니.
매일 똑같은 것만 먹어도 다행이었다.
어머니께서 해주신 밥이었다.
그래도 어머니는 못 먹을 것 불량 식품은 먹이지 않으셨고
그 밥을 먹고 나는 성장했다.
어느 목사가 지난주에도 작년에도 했던 그 내용
이번 주도 그것이 그것인 성경 말씀을 전 했다 하자
가난했던 그 시절 우리 어머니를 생각하면
나는 큰 불만이 없다.
(느헤미야 8:8)
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하여 백성으로 그 낭독하는 것을 다 깨닫게 하매
(
목사가 공부 안 한다 하는 사람 있을지 모른다
나는 그런 것은 심하게 개의치는 않는다.
맛있는 것 못해 주어서 가슴 아프셨던 어머니를 생각하면 그렇다.
성경 열심히 읽지 않고 공부 안하는 목사 두둔하는 것 아니다.
기독교 2000년 역사에 훌륭한 설교자가 얼마나 많았겠는가?
우리 목사님이 그 대열에 있으면 복이고
아니면 그럴 수도 있는 거지.
-깨달음 적어도 열심히 성경을 읽고 말씀을 준비하는 분을 존경한다-
믿음의 식구의 책임 있는 어른 역할을 하면 최소한 만족이다.
나는 우리 어머니, 배운 것 없으시고 가난했어도
사랑하며 존경한다.
못 배워서 자식을 잘 못 가르친다고 자책하시던 우리 어머니
그래도 나는 우리 어머니가 나를 가르치셨다고 말한다.
그래도 나는 그 어머니 밑에서 좋은 대학교 다녔다.
– 또 내 자랑이지만 –
불만 전혀 없다.
나는 목사가 교인들에게 내 어머니 아버지 같은 그런 목사였으면 한다.
목사 영적인 책임을 지는 가장이면 족하다.
(히브리서 13:17)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하고 근심으로 하게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나는 그런 목사를 바란다.
지나친 요구인가?
이런 분이 즐거움으로 주님의 일을 하게 돕고 싶다.
교인을 재산, 양으로 보는 목장의 경영자가 아니고
목장주, 목장의 경영자 관리인이 아니고
양을 잡아 먹는 늑대가 아니고 …
그런 교회에서는 맞서 싸울 수 없으니 나와야 한다.
그래서 나는 목장이라는 용어를 싫어한다.
다른 좋은 의미도 있겠지만 나는 싫다.
)
목사가 교인을 믿음에 있어서 자기가 거두어 먹여야하는
영적인 식구, 자녀로 여긴다면 능력이 좀 모자라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인격적 유대관계 엄마 같인 사랑으로 신령한 영의 젖을 먹이면 된다.
(베드로전서 2:2)
갓난 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어린 그리스도인은 먹여 주어야 신령한 젖을 먹을 것이 아닌가?
물론 주의 종은 하나님의 말씀의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는 데는 동의 한다.
그런데 목사가 교인을 감동시키기 위하여
이런 이야기, 저런 이론, 신학자 누구, 유명한 누구의 말의 인용…
이런 것 싫어한다.
영적인 불량 식품을 섞어 넣은 감동의 강요를 반대한다.
감동적인 Performance 위주의 예배를 반대한다.
때로 그것이 필요한 것을 인정한다.
목사는 영적인 감동을 주기 위하여 노력하는 영적인 ENTERTAINER가 아니다.
행여나 그런 생각 그런 시도를 해서도 안 된다.
영력이 넘치는 신기 넘치는 무당 같은 존재가 되려고 힘쓰는 것 반대한다.
(예배)
예배는 영화관에 가서 하듯 감정 노폐물의 배출행위가 아니다.
물론 이런 말하는 나도 예배 시간에 말씀 들으며 몰래 눈물을 닦은 적이 꽤 된다.
교인은 입장료 내고 감동을 받기 위해 영화관에 들어온 관람객이 되어서는 안된다.
오히려 예배는
어린 아이가 엄마 앞에서 짝짜꿍 하며 재롱을 떨 듯이
하나님 앞에서 기뻐하며 즐거워하며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행위라고 생각한다.
나도 기쁘고 하나님도 기쁘시게 해드리고.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그랬던 것처럼…
(사무엘하 6:21)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
그런데 일주일 내내 하나님 슬프고 화나시게 제 성질대로 죄 가운데 살다가
(
세상에서 빙황 할 때 나 주님을 몰랐네
내 맘대로 고집하며 온갖 죄를 저질렀네
하면서 말이다.
)
예배에 와서 눈물을 흘리고 요란스럽게 뛰고 하면
가인의 제사와 다른 것이 무엇인가?
(창세기 4:5)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평소에 하나님을 노하시게 하며 살다가 제사를 드리니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신 것이다.
그가 평소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다면 하나님께서는 가인의 제사를 받으셨을 것이다.
가인이 양 새끼로 제사 드리지 않아서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신 것이 아니다.
가인의 죄 된 삶을 하나님이 받지 않으신 것이고
따라서 그 제사를 받지 않으신 것이다.
이방신 제사, 굿은 다르다.
이방신은 제물을 드려서 달래주기만 하면 복을 주는 존재(능력있는 바보)로 여겨진다.
이방신의 제사는 죄되고 이기적인 인간에게 참으로 남는 장사가 아니겠는가?
그러니 이방 신을 달래서(살살 꼬여서) 내가 원하는 것
(돈, 명예, 권력..)을 얻고자 굿을 하는 행위가 귀신을 섬기는 행위이다.
(
사실, 이방신의 제사, 굿 같은 것은
무당, 사제가 사람을 속여서 재물을 갈취하는 행위이다.
이기심에 의해 속고 속이는 놀이인 것이다.
)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방신에게 제사하는 행위를 가증하게 여기신 것이 아니겠는가?
오늘날 우리에게
이방신의 신관, 무당 같은 가짜 목사가 있는 것 같이
하나님의 양을 재물로 환산하는 가짜 목사가 있는 것 같이
(
그런 가짜는
영력이 넘친다고 한다.
영성이 넘친다고 한다.
-신기가 있다는 말과 같다 ?-
이상하게 무당들이 쓰던 개념이 탈바꿈을 하여
교회에 들어와 있는 것 같다.
옛날에
교회 팝니다(등록교인 xxx) 라는 광고가 교계 신문에 나왔다.
요새도 그런지 모르겠지만…
)
이방신에게 복달라고 제사 굿판 벌리는 것 같은 교인도 있지 안을까?
아니면 사회적인 어떤 유익을 얻고자 하든지
(상품 판매, 정치 지지자 확보…)
(예배당)
예배당은 (예루살렘) 성전(Temple)이 아니다.
예배당이 성전(Temple)이라면 건물(학교 강당 등)을 빌려 예배를 했던 분들의 성전은 어떤 개념일가?
예배당을 성전으로 생각하는 오류를 반대한다.
그러나
(마태복음 18:20)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말씀과 같이 성도가 모인 곳에 주님께서 함께 계신다는 개념이라면
나는 그곳이 주님의 존전인 성전임에 동의한다.
그런 곳, 성도가 모여 한 마음으로 예배하는 곳이 하나님이 계신 성전임을 인정한다.
성도가 흩어지면 그냥 건물이 될 것이다.
그러니까 예배당이라는 개념이 타당하다.
내가 주일학교 다니던 시절에는 분명히 예배당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성전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용어와 개념의 잘못된 변화라고 생각한다.
일일이 단어 가지고 꼬치꼬치 따져서 무엇하겠냐마는
용어의 변화가 개념의 변화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
나는 가나안 성도라는 개념을 반대한다.
주님을 모신 사람들이 모여서 주님을 높이는 그 곳에 주님이 함께 계신다고 믿기 때문이다.
요새는 목사가 싫고 교인이 싫어서 가나안 성도가 늘어난다고 하는데
그런 분들은 맘에 드는 교회 찾으면 참 좋겠다.
못 찾으면 그런 분들끼리 모여 하나님께 예배하면 되지 않을까?
하나님을 한 마음으로 부를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을 찾아야 되지 않겠는가?
그러면 또 이단 하나 생겼다고 트집하려나?
참, 까탈스러운 세상이기는 하다.
)
예배당을 가리켜 (예루살렘 성전과 유사한 개념의) 성전으로 개념 변경을 반대한다.
그렇게 하면 목사는 아론 자손 제사장이 되고 (말이 안 된다)
교회에서 전임으로 섬기는 분은 레위인 성전 관리자가 되고… 등등
개념상의 혼동 오류를 범하게 된다.
매우 복잡해지면서 예배당과 예배의 본질을 구약 시대로 되돌린다.
물론 옳지도 않다고 생각한다.
예배당은 성전이 아니다.
(
성경을 열심히 읽어야 바른 개념이 형성된다.
내가 불필요하게 까다로운 사람일까?
왜 나는 반대하는 것이 이리 많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