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을 말함과 진실을 말함.

 

(창세기 3:12,13)
12 아담이 가로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13 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가로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질문을 하셨을 때
(창세기 3:11)
“내가 너더러 먹지말라 명한 그 나무 실과를 네가 먹었느냐”

아담도 하와도 하나님께 사실을 말했다.
그리고 그들이 말한 사실에 근거하여
하나님께 저주, 징계를 받았다.

만약에 아담이
“하나님 죄송합니다. 하나님의 명을 어겼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했더라면
만약에, 만약에 하와가 그랬더라면…
인간의 역사는 어떻게 되었을까?
성경은 어떻게 쓰여 졌을까?
참 많이 더 좋은 방향으로 달라졌을 것이다.
(
물론 이런 상상은 필요하지 않다.
그냥 흥미 삼아 생각할 뿐이다.
)

우리는 신뢰하기 어렵고 두려운 그러나 힘을 가진 상대,
예를 들어 재판관 앞에서는
사실을 말해서 나의 징벌을 피하려하거나
거짓을 말해서 나의 징벌을 면하려한다.

예를 들어 교통위반으로 경창에게 잡히면
가능한 자신에게 유리한 사실을 입증하려고 애를 쓴다.
경찰은 내게 교통위반 딱지를 주려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를 이해하고 사랑해주는 상대 앞에서는
마음속의 진심을 말해야 관계가 회복된다.
관계의 회복을 중시하는 말을 해야 한다.
그래야 최종적으로 유익이 된다.

아들이 어릴 적에 밖에서 놀다 소변이 급해서 집에 오다 오줌을 쌌다.
엄마에게 혼이 나게 생긴 상황이었는데…
“엄마 보고 싶어 빨리 오다가 오줌 쌌어. 엉 엉” 했다.
사실일 수도 있고 아마도 거짓말이었을 것이다.
엄마는 깔깔 웃으면서 아들을 꼬옥 껴안아 주었다.
아들이 너무도 귀여웠던 것이다.

(지금은 40이된 그때 그 아들)

우리 하나님은 그런 분이시라 믿는다.
그러니까 하나님 마음을 아주 쪼끔 이어받은 울 마눌이 그랬겠지?

우리의 조상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이렇게 감정적으로 신뢰하지 못한 것이
지혜를 주는 선악과를 따먹고 우리에게 온 비극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냥 내 생각이다.

우리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꾸짖으시며 너무 너무 가슴이 아프셨을 것이라 생각한다.
어디 아담과 하와만 그런가?
나는 매일의 삶에서 그런 태도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산 적이 얼마나 많은가?
아니 그렇지 않은 태도로 산 적이 얼마나 되는가?
하나님 앞에서 매일 같이 그 마음을 아프시게 한 것에 대하여
죄를 회개하고 또 해도 모자라는 존재가 바로 나인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나의 실존인 것이다.

“도대체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도대체 예수쟁이는 무슨 죄가 그렇게 많아서
매일 울며 회개의 기도를 하나?“
이렇게 생각한다면,
그게 바로 하나님 잎에 죄를 고백하고
회개해야할 마음의 태도라고 믿는다.
(
내가 바로 그렇게 생각한 사람이었다.
나는 모범생이고,
매만 맞고 지냈지 남 괴롭힌 적도 별로 없고
죄도 별로 지은 것 없고…
회개할 것 없는 사람인데?
굳이 죄인이라면 할 말은 없지만…
이라고 생각했다.
참으로 부끄러운 생각이다.
)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 그 앞에 나오는 사람이라면
그런 사람에게는 율법이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가인에게 가서는 한술 더 떠서 뻔한 사실이 있는 데도
(창세기 4:9)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가로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이니까

오리발을 내민다.
아니, 하나님 언제 제게 동생 지키라고 시키셨습니까?”

그 가인의 후예이기도 한 우리, 현대인은
“봤어?”,
“증거 있어?”
“증거를 대봐?”
“내가 왜 죄가 없다는 증거를 제시해야 되?”
“죄가 있다 말하는 네가 나의 유죄라는 증거를 대야지?”
(이것은 법률적으로 맞는 말이기는 하다)
이것이 우리의 실상이다.
믿을 수 없는 사람과 사람의 시스템에서는 그렇게 돌아간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그러지 말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일본말에는 진심(혼네 本音)라는 말과
명목적 사실, 형식적인 규범에 맞는 말(다테마에 建前)라는 말이 있다.
우리는 일본사람이 말하는 다테마에를 말함으로 책임을 회피하고
자기의 이기적 존재를 방어하려는 경향이 많다.

정치가, 외교가, 국제관계, 공적인 발언, 국회에서 정당의 발언, 무슨 협회의 시국 발언,
종교단체의 발언, 신문기사 … 다 그렇다.
속셈은 감추고 말만 말이 되게 말한다.
그리고 그들의 속셈은 그들의 과거의 행적을 보면 들통이 난다.
남의 말을 들을 때, 신문기사 볼 때, Youtube 볼 때…
일단 의심을 하고 읽어야 한다.
내가 쓰는 이글도 똑 같이 해당 된다.
(잠언 20:6)
많은 사람은 각기 자기의 인자함을 자랑하나니 충성된 자를 누가 만날 수 있으랴
이 말씀은 불행한 진실이다.

그러면서
모두들 내가 아닌 타인에게는 진실을 요구한다.
신천지 교리에 신천지가 아닌 사람에게는 거짓말 하라 가르친다하고
이슬람 교리에 이슬람이 아닌 사람에게는 거짓말 하라 가르친다하고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에서는 군주는 거짓말, 악을 해도 된다 했다 하고
(
난 군주론 안 읽었다 그냥 주워들은 말이다.
난, 성경 외의 책은 읽지 않는다.
안 읽어도 그냥 주워듣는 말 너무나 많다.
내 나이만큼 성경 통독하기 전에 다른 책 안 읽을 것이다.
그게 뭔 자랑이라고…
)

진심을 들어 내는 관계가 아쉬운 때다.
그런 사람을 만난 분은 인생에서 성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려면 그런 사람을 만나려고 하지 말고
내가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나는 그렇지 않으면서 남에게는 진심을 요구함은 너무 이기적이다.
그런 사람 SNS 상에서라도 결코 만나고 싶지 않다. 거부한다.

예수께서는 “누가 나의 이웃입니까?”하고 질문한 율법사에게
(누가복음 10:29)
이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이웃을 찾지 말고 “네가 그런 이웃이 되라!”라고 명령하시었다.
(누가복음 10:37)
가로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나는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해서 힘쓸 것이며
그렇지 않은 사람은 멀리할 것이다.
논리적 모순일지 모른다. 모순이 밝혀지면 행동을 바꿀 것이다.
최소한 하나님 앞에서 나를 정당화하며 최면 거는 위선은 피할 것이다.

인간은 교활해서, 그리고 교만해서
우리의 조상인 아담과 하와를 닮아서
하나님 앞에서 마저도 자기를 기만한다.
“나는 죄 없어요 하나님 재 때문에 그런 거예요”
이런 사람은 되지 말아야겠다.

물론 그런 사람을 찾아 악용하려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지혜로울 필요는 있다.
그래서 판단의 기준 원칙이 미리 세워져 있어야 하는 것이리라.
심각하지 않으면 넘어가 주는 아량도 필요할 것이다.
주님의 교훈은 현대에 사는 나에게도 유효하다.
(마태복음 10:16)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세상살이가 복잡하다.
나는 주님의 보호가 필요한 존재이다.
(마태복음 6: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사실이 아닌 진실을 말하는 사람으로 존재하기를 소망한다.

(
창세기를 읽다가 생각한다.
아쉬운 시선으로
다시 보는 창세기
나의 사팔 눈으로 보는 창세기.
나는 내가 생각해도 복잡한 사람이다.
어린아이 같지 않아서 어디… 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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