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은 순수한가?

   

 

누가 내게 취미와 시간 보내기에 대해 물었다.
아마 골프 혹은 여행을 한다 등의 대답을 기대한 것 같다.
그런데 운동에 취미 없는, 재미없이 사는 나는
오디오 앰프를 만들어 음악을 듣는 것과
매일 성경 읽는 시간이 많아 성경 읽는 이야기를 하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성경을 많이(70번?) 읽었다고 말했다.
(
실수였다.
요 방정맞은 입이 문제다.
)
자랑(질)하려고 성경을 읽는 것 아니냐고 날카롭게 되물어보신다.
물론 부드럽게 빙글 돌려서 물어 보셨다.
(
오죽 자랑할 것이 없으면 그걸로 자랑질이냐 하는 말씀이다.
사실이다. 내가 자랑할 것이 뭐가 있나 ?
돈이 많나?
건강하고 힘이 좋은가?
자녀가 잘나서 효도를 하나?
박사 학위라도 있나?
등등의 생각이 획 스쳐지나간다.

그러니 열등감에서
뭔가 자랑하려고 성경 읽은 자랑을 한다는 뜻일 것이다.
태도가 불순, 유치하다는 뜻일 것이다.
속 좁은 나는 그런 생각이 퍼뜩 들었다.

그때 예레미야 9:3,24는 왜 생각나나?
[예레미야 9:3,24]
(23)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 용사는 그의 용맹을 자랑하지 말라 부자는 그의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
(24)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

그래서 생각을 했다.
내가 성경을 열심히 읽어서, 그걸 자랑하려고, 숫자를 세어 가며 읽었나?
잘 생각해 보면 자랑하려는 그런 마음이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면 오직 사람들에게 자랑하려는 목적으로 성경을 읽었는가?
순수한 동기는 전혀 없었나?
그것도 아니다 순수한 동기도 물론 많이 있다.
나의 글 여기를 보면 그 동기가 적혀 있다.

(Link)
2019 성경 통독을 생각한다.


그러니까 순수한 동기와 유치한 동기가 함께 공존하는 것이다.

그래서 대답하기를
그게 한마디로 말하기 미묘한 사항이다
자랑하려는 유치한 생각도 전혀 없었다 말하기 어렵다.
그러나 순수한 동기도 많이 있었다. 라고 대답했다.
참 대답하기가 어려웠다.

순수하지 않은 뒤틀린 마음으로 그렇게 질문하셨을 것이다.
(
성경 많이 읽었다는 자랑질에
“아! 그러셔”하고 마음 편한 사람이 얼마나 될까?
요렇게 생각하는 나도 속이 좁고 비틀려있다.
)
이렇게 인간사 많은 부분을 꼬아 보는 사람이 적지 않다고 생각한다.
사람의 말을 믿고 살았더니 손해를 본 경험이 많아서 그런 것일까?
잘 모르겠다.

내 의견에는
사람의 머릿속 생각은 100% 이것 혹은 100% 저것인 경우는 매우 드물다고 생각한다.
많은 부분은 이 쪽인데 조금 더 많은 부분은 저쪽인 경우가 많지 않을까?
적어도 나는 그렇다.
어떤 일을 실행하기 전, 그것이 매우 중대한 결과를 초래하는 사안인 경우
나는 이리 생각하고 저리 생각하고 이럴까 저럴까 망설인다.
머릿속에는 온갖 가능성이 들락날락거린다.
그리고 결정을 못하는 경우도 많이 있다.
(
마치 양자 역학적 현상에서 전자의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는 것과 같다.
확률적으로만 존재한다.
여기에 존재할 수도 있고 저기 존재할 수도 있다.
)

그러나 몸으로 하는 실천은 한 순간에 딱 한 가지이다.
이것을 하거나 저것을 하거나 …
(
마치 양자 역학적 현상에서 전자의 위치가 관찰 되면
그 순간 확률은 사라지고 100% 그 위치에 전자가 존재하는 것과 같다.
양자 역학적인 현상과 비슷한 일이 마음의 생각과 몸의 행동에서 나타난다.
물론 이것은 양자 역학 현상은 결코 아니다.
)

생각은 100% 순도를 유지할 수 없다.
사고활동은 이분법이 아니다.
아는 듯, 모르는 듯도 하고,
이것 같기도, 저것 같기도 하다.
어느 대중가요 가수는 “내 마음 나도 몰라” 라고 노래했다

그러나 행동은 이분법이다.
움직이는 몸이 하나이기 때문에 이것 아니면 저것이다.
이런 것을 따지는 것도 결국은 사고 활동이니
“나는 생각한다 따라서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제가 나왔을 것이다.
그래서 키에르케골은 “이것이냐 저것이냐 선택의 순간은 엄숙하다”라고 말했을 것이다.

신앙적 사고 활동도 이것 아니면 저것의 이분법이 아니라고 본다.
사고 활동은 온 갓 가능성을 생각한다.
머릿속으로 여러 가지로 생각 하고 회의도하고 하나님께 “욥”처럼 따지듯이 질문도 하고 …
그런 사고 활동을 불신으로 생각하는 분도 많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의 명령에 대한 실천은 몸이 하나이기 때문에 “하느냐 마느냐?”
“순종이냐 불순종이냐?” 이분법으로 나누어진다.
나와 같은 우유부단한 사람은 아무 것도 안하는 경우가 많겠지만 …
그래서 아무것도 않고 가만히 있는 것도 불순종인 경우가 많다.

또 자기 말을 하나님의 말씀처럼 즉시 순종해야 할 명령인 것처럼 심리적으로 압박하는 가짜 주의 종도 많다.

결론적으로 생각은 100% 순수하기가 어렵다.
그렇다면 세상살이가 혹 고달플지언정 결정은 쉬울 것이다.
남을 보고 판단할 때에 그의 행동에 는 O X를 칠지언정
그의 마음 속 의도를 내가 가정을 세워 불순하다고 비판하는 것은 위험하다.

어쨌든 나는, 동기가 유치했든 순수했든 몸으로는 성경을 매일 읽고 있다.
읽은 숫자는 매년 늘어간다.
무슨 자랑거리도 아니지만 …

나의 결론은 …
생각은 이런 저런 갈등을 하고 나뉠 수 있다.
순수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한 순간의 행동은 한 가지 뿐이다.
그것을 보고 우리는 그의 행동이 그 행동의 근원이 되는 마음이 순수하다 아니다 라고 판단한다.

(사족)

성경에도 마음속으로 이것인가 저것인가 갈등하는 장면과
그 갈등의 결과에서 나온 고백을 주님께서 믿음으로 인정해 주시는 기사가 나온다.

[마가복음 9:22-27]
22 귀신이 저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
23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24 곧 그 아이의 아비가 소리를 질러 가로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하더라
25 예수께서 무리의 달려 모이는 것을 보시고 그 더러운 귀신을 꾸짖어 가라사대 벙어리 되고 귀먹은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 하시매
26 귀신이 소리지르며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나가니 그 아이가 죽은 것 같이 되어 많은 사람이 말하기를 죽었다 하나
27 예수께서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이에 일어서니라

내가 주의한 구절은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라고 외친 이 아버지의 말이었다.
이 얼마나 모순 가득 찬 외침인가?

(1) 내가 믿습니다 (믿음?)
(2) 나의 믿음 없는 것 (불신)
(3) 도와 주소서 (못 믿는 그것도 도와 주세요)

내가 주목한 구절은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가 아니다.
우리는 제한된 존재이기에 능력 좋아한다. 그래서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을 강조하는 가보다 만…

아버지가 다급한 마음에 말을 했지만
“곧 그 아이의 아비가 소리를 질러 가로되”
아버지는 자기가 생각해도 믿음이 없으니까,
의심하고 있으니까
그러니까 불쌍한 아들을 고치기는 다 틀렸으니까?
만약에 예수님이 참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가진 분이라면… 어쩌나?
그래서 절박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어찌하겠는가?
“예수님 제가 믿지 못하는 데 이 믿지 못하는 것도 어떻게 좀 해주세요 네?“
외치지 않았겠는가?

그러데 예수님께서는 다른 아무 말씀도 안하시고 아들을 고쳐주셨다.
아버지의 고백을 믿음으로 인정해 주셨다는 말이다.
마음에 일어나는 불신, 의심 까지도 주님 앞에 내어 놓고
해결해 주시기를 구하는 것이 주님께 나오는 첫 걸음이라 믿는다.

“믿고 싶어도 안 믿어져”
이런 생각이 우리의 이성과 논리의 장난, 방해이다.
이성과 논리가 믿음을 가로 막는 대표적인 예.
경험에 기초한 이성, 논리로는 주님께 나올 수 없다.
그러나 우리 속 어딘 가에서는 예수님께 나오고 싶다.
두 마음이 서로 갈등하는 예이다

이 때, 외치는 거다.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부끄럽게 생각할 일이 아니다.
믿어지지 않는 마음조차 예수님께 맡기고 매달리는 것,
그것은 믿음이라고 확신한다.
예수님께서 이 아버지의 부르짖음을 들어주시지 않았는가?

이것은 나의 글을 인용한 것이다.
“믿을 때 감동이 없었어도 (6) 믿고 싶어도 안 믿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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