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구원 경륜-3 (율법?)

   

 

그렇다면 구약 성경, 율법은 뭔가?
그리스도인에게 율법은 어떤 의미가 있나?

예수님은 “율법의 일점일획도 없어지지 않는다” 고 하셨다.
(마태복음 5:17,18)
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
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로마서 15:4)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안위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구약 성경도 하나님의 말씀이며 우리의 교훈에 매우 중요하다는 말씀이다.
인내, 성경의 안위로 소망을 가지게 한다고 말한다.

어찌 보면 그리스도인이 구약 성경을 읽으며
구약에 기록된 율법을 지키고자 하는 충동을 받는 것은 자연스럽다.
감명 깊은 드라마를 보고 감동을 받아서
드라마 속의 주인공에게 자신을 몰입해서
드라마의 주인공처럼 행동하는 것과 비슷하다.
쉬운 것을 따라 하면 재미있겠지만 힘 드는 걸 따라하려면 아주 고역이다.
일상생활에서 그렇게 따라한다면 우스운 일이다.
그렇게 하는 사람도 없다.

그것을 자기가 따라서 하든지 말든지 상관없지만 남에게 하라고 강요하거나
그렇게 하지 않으면 성경 말씀에 불순종 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주 나쁘다.
기만이다.

다른 비유로는
아버지가 한 자녀(유대인)를 격려, 훈계, 경계 하시며
이걸 해라 저건 하지 말라 명령하시는 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가 거의 그렇다)

그걸 본 다른 자녀(그리스도인)가
“아! 저렇게 하면 안 되고 이렇게 해야 되겠구나“ 라고 생각하고
미리 알아서 현명하게 처신 한다면 거의 대부분은 맞을 것이다.
그러나 눈치 없이 불필요한 과잉 반응을 할 가능성도 매우 높다.
다른 자녀가 직접 훈계를 받는 자녀가 꾸중 들은
바로 그 명령을 그대로 따라 하는 것은 아버지의 뜻이 아닐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아니 그걸 네가 왜 해? 누가 너보고 그렇게 하라고 했어?” 라는 말을 듣기 십상이다.
특정 명령은 그 명령을 받은 그 사람이 순종 해야만 효과가 있는 것이 거의 대부분이다.
명령을 직접 듣지도 않은 사람이 그것을 하면 씅 데 없는 간섭이 되는 경우가 많다.
현명하게 알아서 응용하여 순종할 수도 있고 그냥 지나쳐도 되는 그런 입장이다.
(
 그 명령은 자기에게도 동일하게 해당 될 가능성도 있고
 보통은 전혀 해당이 안 되는 것도 아주 많다.
 구약의 율법 조항은 거의 100% 그리스도인에게 해당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벽하게 그 요구 조건을 이루셨고
 그리스도인은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이다.
)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로마서 15:4)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안위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그것은 교훈을 위하며 기록 되었으며 소망을 가지게 하는 것이 목적이라고 했고
그것을 따라서 하라는 뜻이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자기 신분에 대한 정체성(Identity)이 분명해야 한다.
분별력 있는 그리스도인은 성경에 기록된 구약의 율법을 보고
이것을 나의 삶에 순종 적용하는 것이 옳은지 아닌지
어떻게 적용 실천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인지 분별할 지각이 있다고 믿는다.

분명히 그리스도인은 아브라함의 율법을 받기 전 믿음 안에서
율법과 무관한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 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았겠지만 율법을 지키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브라함이 살았을 때에는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없는 율법을 어떻게 지키 수 있을 것인가?
그리스도인은 율법 이전 아브라함의 믿음을 이어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또,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하면 구약의 모든 율법은 만족시키는 것이다.
이미 예수님께서 구약의 모든 율법과 예언을 만족시키셨고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마태복음 22:37-40)
37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갈라디아 5:14)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

그리스도인이 구약의 율법을 행함으로 하나님 앞에 무엇인가 되려함은
오해에서 온 과잉 반응이며, 자기의 정체성(Identity)을 모르는 것이며
율법을 요구를 만족 시키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을 거부하는 일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이 부족하다고 믿어
다시 율법을 지킴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려는 태도이기 때문이다,
예수그리스도를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것 같은 용서받지 못할 죄를 범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이 뭔가 부족하여 율법을 지켜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얻으려는 것이니
예수님께서는 또다시 십자가에 달려서 죄를 용서해 주셔야 된다.
그러면 예수께서는 창세 이후로 여러 번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리셔야 된다는 말이다.

(히브리서 9:26,26) 은 그것을 말하고 있다.
25. 대제사장이 해마다 다른 것의 피로써 성소에 들어가는 것같이 자주 자기를 드리려고 아니하실지니
26.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은 단 한 번으로 족하다는 말씀이다.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책망한다.
(갈라디아서 3:1)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이 책망은 오늘도 유효하다.

(갈라디아서 3:1-14)
1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2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3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4 너희가 이같이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 과연 헛되냐
5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듣고 믿음에서냐
6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7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인줄 알지어다
8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니
9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10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11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니라
12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라 이를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1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창세기 17장부터 예수님 오시기 전까지 성경의 모든 내용은
언약의 백성, 율법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하시는 명령이다.
율법 이전의 아브라함의 믿음, 축복에 참여한 그리스도인에게 하신 말씀이 아니다.

창세기 17장 첫 부분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세우시는 장면이다.
하나님의 믿음의 축복은 이 언약 이전에 하셨다. (12장, 15장에 나온다)
(창세기 17:1-10)
1 아브람의 구십구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2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세워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라 하시니 3 아브람이 엎드린대 하나님이 또 그에게 일러 가라사대
4 내가 너와 내 언약을 세우니 너는 열국의 아비가 될지라
5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로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함이니라
6 내가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니 나라들이 네게로 좇아 일어나며 열왕이 네게로 좇아 나리라
7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와 네 대대 후손의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8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너의 우거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일경으로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9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그런즉 너는 내 언약을 지키고 네 후손도 대대로 지키라 10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이스라엘 민족은 언약, 율법의 민족이다.
그것을 반드시 지켜야할 강제적인 의무가 있는 민족이다.
물론 그들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법을 지키지 못했다.
(신명기 29:10-13)
10 오늘날 너희 곧 너희 두령과 너희 지파와 너희 장로들과 너희 유사와 이스라엘 모든 남자와
11 너희 유아들과 너희 아내와 및 네 진중에 있는 객과 무릇 너를 위하여 나무를 패는 자로부터 물 긷는 자까지 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 앞에 선 것은
12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에 참예하며 또 너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오늘날 네게 향하여 하시는 맹세에 참예하여
13 여호와께서 이왕에 네게 말씀하신 대로 또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대로 오늘날 너를 세워 자기 백성을 삼으시고 자기는 친히 네 하나님이 되시려 함이니라

유대인의 경우를 생각해 보면
그들은 하나님께 받은 율법을 온전히 지키지 못했고
죄의 용서를 받으려면 양, 염소, 희생 제물을 잡아 죽여 제사를 드려 죄의 용서를 받았다.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 제물에 대한 예표이다.
율법을 지켜 의롭다하심을 얻으려면, 실패를 할 것이고,
따라서 율법에 따라 희생 제물을 잡아 제사 드려야 하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을 거부하는 결과가 된다.
(대단한 믿음의 모순이다)

그리스도인이 자기의 정체성(Identity)을 혼동하면 이런 우스꽝스러운 일을 하게 된다.

그리스도인은 유대인이 아닌
아브라함이 할례 받기 전(창세기 12장),
율법 이전의 믿음에 연결되어 하나님 앞에서 아브라함의 축복을 함께 누리는 존재이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또, 구약 성경의 모든 내용은 직간접적으로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Symbol) 하거나 예언하고 있다.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빼면 구약 성경의 이해는 불가능하다.

구약성경은 하나님께서 오로지 메시아 예수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만민을 위해 보내시려고 계획하고 실행하신 기록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이스라엘의 언약, 율법, 역사, 예언 속에 들어있는 것이다.

창세기부터 말라기까지 구약 성경의 내용은
오직 하나님의 인류 구원 계획인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께 초점이 맞추어져있다.

그 출발점에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있다.
그 메시아를 보내기 위한 민족으로 유대민족이 있다.
그 유대 민족이 율법과 메시아의 언약을 받은 것이다.
메시아를 배출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민족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대인은 메시아를 이방에 알리기 위한 제사장 민족인 것이다.
 그것이 선민인데 그것을 특별히 선택받아 다른 민족보다 우월한 민족이라 오해함은 문제다.
 물론 이스라엘 민족은 그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성경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가장 적은 민족이라고 말씀하셨다,
 (신명기 7:7)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마찬가지로
 성도를 돌보고 섬기라고 세우신 교직자(목사)가 영광과 존경을 받으려 한다면
 이것도 동일한 착각 오해이며 모순이다.
)

예수 그리스도를 모신 그리스도인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율법 이전에 믿음으로 접붙임 받은 존재이다.

하나님이 그 긴 과정을 통해 공들여 보내신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
그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율법 이전 아브라함의 믿음과 축복에 참여한 그리스도인이
그 이후에 주신 구약의 율법을 의지하여 하나님께 가까이 하려는 함은 출발점의 오류이다.

그것을 오해하면
구약의 율법도 당연히 영원히 변치 않는 하나님의 말씀이니까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게 마련이다.
이것은 논리의 출발점의 오류이다.

(
 이것을 간과하기 쉬운 이유는
 아브라함의 믿음의 축복은 창세기 12장 – 15장에 짧게 나오고
 그 다음 출애굽기부터 구약의 마지막 말라기 까지
 언약과 율법에 대해 계속 나오기 때문에 혼동이 온다고 생각한다.
 성경 전체의 중요한 문맥을 놓치기 때문이다.
 성경교사, 설교자도 놓치기 매우 쉽다고 생각한다.
)

이것을 생각하지 않고 성도를 가르치면 개념을 혼동한다.
그리고 가짜, 사이비, 율법주의가 끼어들 여지를 제공한다.
한편으로는 예수님 믿는 것 전하는 전도 자체가 매우 어려우니
여기까지 가르치기가 너무 어려운지도 모른다.

(
 예를 들면
 성경에 하나님의 말씀에 명백히 있는 데
 “넌 왜 안식일을 안 지키냐?” 하게 된다. 
 진지한 그리스도인에게도 이런 오류가 자연스럽게 있다.
 뭔가 그 말이 이상하기는 한데 딱히 뭐라고 반박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안식일은 토요일이다. 일요일을 안식일의 개념으로 봐도 된다 등 불필요한 논쟁을 한다.
 성경을 이해하지 못한 오류다.
 성경 전체를 주의해 읽어야 한다.
)

사도 바울은 선언한다.
(골로새서 2:16,17)
16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17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실체인 그리스도를 모신 그리스도인이 그림자에 집착하는 것은 오류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만 집중해야 하는 것이다.

구약을 무시하라는 말은 아니다.
과거의 기록으로부터 교훈을 받고 행동을 정하는 것은
그 중요성을 강조하고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그러나
구약의 율법에 매이지 말라는 말이다.

(
 율법이 무엇이냐에 대한 오해도 있을 수 있다. 
 어떤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자기가 마음으로부터 어떤 생활의 규칙을 정해 놓고 그것을 실천해 보고
 그 효과를 평가해보고 계속 하든지 말든지 하는 것은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면
 “매일 기도 하겠다”
 “성경을 일 년에 한 번 읽겠다”
 “주일에는 예배를 꼭 참석하겠다.”
 등등을 마음에 정하고 실천한다고 하자.
 누가 이런 것을 보고 그 사람이 율법적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율법적 이라는 용어의 의미를 지나친 확대 적용한 오류이다.
 남을 비난하고자하는 불순한 의도로 하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결심은
 해보다가 효과가 없거나 힘들면 그만 둘 수도 있고 계속할 수도 있는 자유로운 것이며,
 격려할 만한 좋은 태도이다.

 자기 생각대로 율법적이라는 말을 쓰는 것도 오류이며, 은연 중 남을 비난하는 것이다.
 범죄나 마찬가지라고 본다.
 율법이라는 용어의 확대 해석은 곤란하다.

 율법적이라는 말은
 “성경에 기록된 율법을 지키려 하고, 율법을 범하면 제사를 드려 죄 사함 받으려는 삶을 산다” 고
 좁은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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