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흙 수저.

 

나는 흙수저 출신이다.
불만 없다. (불만이 있어도 별 차이 없다)

나와 관련된 조국의 일들을 보면
내 시대 사람들 살아온 모습을 알 수 있다.
물론 내 부모님께서는 더 어렵게 사셨디. 

[일본제국 시절: 부모님 세대]
1910 한일합병
1917 부친 출생 (부모님께서 고생 엄청하심) 

[이승만 집권 시절 10년]
1950 625사변. (내가 태어난 해)
1960 419혁명, 315부정 선거. (국민학교 4학년 때) 

[박정희 집권 시절 19년]
1961 516군사 구테타. (국민학교 5학년 때)
1966 한국의 월남전 참전, 독일에 광부 간호사 파견
1968 121 사태. 북한 김신조 사건 (고등학교 3학년 때)
1974 문세광 육영수여사 저격 살해 사건 (대학 졸업)
1976 (결혼)
1979 1026사태 김재규 박정희 저격. 

[전두환, 노태우 집권 시절]
1980 518광주 항쟁
1987 평화의 댐 착공 (월급에서 기부금 강제납부) 

[김영삼, 김대중 집권 시절]
1997 IMF사태 경제 위기 (국가 빚 갚는다고 금반지 헌납) 

[미국 취업]
1998 (미국 취업 도미)
2001 (미국 911 테러 사건 및 경제침체) 

******************** 

1950년 625 전쟁 때 태어났다.
전쟁 후 서울로 와서 피난민 촌에서 살았다.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 2가 금화산 밑.
(물론 지금은 좋은 동네일 것이다) 

그런데 그 금화산이 피난민촌 하꼬방 동네였다.
정확히는 형편없는 산꼭대기 하꼬방 피난민촌 바로 밑에 붙어있는 좀 덜한 피난민촌에 살았다.
하꼬방이란 일본 말 같은데 양철지붕과 포장상자로 벽을 한 집이다. 

전기 없어 촛불 켜고 사는 데,
뒤 늦게 밤에만 전기가 들어온 곳은
두 집이 벽을 대고 붙어 있는데 두 집 가운데 벽에
구멍을 뚫고 전등이 하나가 있다.
백열등 전구 하나를 공유하는 것이다. 

그런 집들이 모여 사는 산동네 난민촌이다.
온 동네에 공동 화장실 다섯 개.
그냥 퍼내는 변소인데 뭐 퍼낼 수가 없어서
인분이 그냥 산골짝을 타고 흘러내린다.
그 옆에는 배추 무우 밭이 조금 있고… 

겨울에는 불도 자주 난다.
먹지 못해 배고파 얼어 죽는 분도 있는 그런 동네였다.

나는 바로 밑에 조금 나은 동네에 살았다.
우리 집은 진흙을 이겨 말려 만든 진흙 블록으로 지은 집이었으니까.
비가 오래 심하게 오는 장마철이면 집 담벼락이 물에 젖어 무너진다.

내가 1965년 까지 살던 집 사진이 하나 남아 있다.
이건 돈 벌어서 집을 개조하고 해서 가장 좋을 때의 모습이다. 

경제적으로 못살다 보니 영양 결핍으로 몸이 약했다.
밤에는 눈이 잘 안 보이는 야맹증을 알았는데 병인 줄도 몰랐다.
학교 가서 배워서 아- 내가 야맹증이었구나 하고 알았다.
그런 사람이 많았으니까.

초등학교 다니던 1960년대 대한민국의 GNP가 70불 이었고
1972년까지 북한보다 GNP가 낮았다. 못살았다.
북한으로부터 원조를 받은 적도 있다.

나라가 그렇다 보니
상이군인들이 돌아다니며 협박도 해서 먹고살고
(안 좋은 나라였다)
거지, 양아치 많고…

그런 동네서 살다보니 청소년 도덕 수준 말할 수 없었다.
농사짓는 시골 동네 보다 더 살기가 어려운 곳이었다.
그것이 대한민국의 1950-60년대의 수도 서울 한구석의 현실 이었다.

이것을 벗어나게 한 박정희(대통령)의 공은 인정해 주어야한다. 

이런 동네가 1970 년대까지 구로동, 신림동, 봉천동 등에 있었다.
수준은 거기서 거기지만 아주 조금 나아지기는 했다.

그런데 그런 시절 초등학교 3학년 때
그 당시 미동국민학교를 다녔는데
이승만 대통령의 80회 생일을 맞이하여
어린애들 전교생이 운동장 바닥에 앉아서
이승만 대통령 80회 생신 축하 글짓기 대회를 했다.
참 웃기는 나라였다.
그것 하나만 으로도 나는 이승만(대통령) 나쁘다고 생각한다.
김일성 우상화나 크게 차이 없다고 생각한다.
뭐, 사람마다 공과 허물은 있게 마련이라고 하더라도…

그때는 중, 고등학교, 대학교 모두 입학시험을 치고 들어갔는데
중, 고등학교, 대학교 모두 내가 학교 찾아가서
입학원서 받아다 원서 직접 쓰고 입학시험 보고 해서 학교에 들어갔다

위로 누님 세분 계시는 데 처음으로 내가 공립 중학교 들어갔다.
초등학교 학생의 개발 새발 글씨로 입학원서 쓰고 중학교 입학했다는 말이다.
어머님은 옛날 분이라 무학, 학교를 못 다니셨고
아버님은 힘겹게 식구들 벌어 먹이고 사시기 너무 바쁘시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래도 전혀 불만 없었고 지금도 불만 없다.

쉽게 말해 가문이랄 것도 없는 별 볼일 없는 집안
난민촌 보다 아주 조금 나은 동네 출신이라는 말.
그러니 내게 뭐 그리 큰 꿈이 있을 리 없었다.
어릴 때 꿈이 “커서 고물상 하고싶다“ 생각 했을 정도다.
고물상에는 온갖 신기한 것들이 다 있었으니까.
(지금 취미로 온갖 고물 모아서 Amp 만들고 있다)

아버님은 공장(철공소)을 하셨다.
기계를 만들어 파셨다.
고3 때, 공장에서 전기 일을 하며 아버님을 도와 드렸는데
기계에 들어가는 전원트랜스를 감아 넣어 기계를 납품하는 것이다.
(지금은 트랜스 감는 공식 다 잊어버렸다)

그런데 중간시험을 보는 기간인데 기계 납품일이 겹치고 문제가 생긴 것이다.
그래서 밤새워서 현장에 가서 기계 고치고
(돈 벌어야 먹고 사니까)
학교 가서 첫 시간 시험 보고
너무 졸려서 잠깐 자고 둘째 시간 시험 본다고 벤치에서 잤다.
담임선생님이 시험 감독을 들어오셨는데
한 놈이 자리에 없어서 찾아보니
벤치에서 자고 있는 것이다.
짝꿍이 헐레벌떡 달려와서 깨워서 한 대 맞고 시험 봤다.

그런 내가 당시 대한민국에서 가장 좋은 대학교에 합격을 했다.
우리 가문 전체에서 대학교 입학한 사람 중 처음이었고
내가 자란 하꼬방 동네에서 대학교 입학한 유일한 사람이었다.

존재 자체가 힘이 들었던 나에게
내 생각에도 대학 입학은 참 대단한 일이었다.
나에게 더 이상의 꿈은 필요 없었다.
생각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전혀 기억이 없다.
그러니 세상에서의 출세에 전력을 다할 수 있었겠는가?
모든 사람이 다 출세하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대학 수업 첫날
어떤 분을 만나 예수님을 소개 받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다.

[요한복음 1:12-13]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나 같은 사람도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해주신다니
그게 참 좋았다.
그래서 나는 예정이니 선택이니 하고 왈가왈부 하는 것 싫다.
“ 믿으라고 하시면 믿으면 되는 거지. 자녀로 인정해 주신다는 데“
그냥 그렇게 생각한다.
그리고 왜 안 믿는 것인지도 이해가 안 된다.

내 자란 배경이 그래서 그런지 모르지만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꿈이나 야망도 별로 없었던 것 같다.
”거룩하고 위대한 하나님의 종?“ 그런 생각 별로 하지 않았다.
그냥 예수님 믿고 의지하여 하루하루 살면 만족하다 생각했다.

봄에 피어나는 민들레꽃을 보며 하나님의 섭리를 느꼈다.
겨울의 매서운 추위를 견디고 봄에 다시 살아나는 것이
나 같다고 생각해서였을까?

그래서 그런지 성경에서 좋아하는 인물은 에녹이다.

[창세기 5:21-22]
21 에녹은 육십오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22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냥
오늘도 내일도
금년도 내년도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그날까지 변함없이 꾸준히
하나님과 동행하면 산다는 것이 참 좋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
그런데 내가 에녹처럼 살고 싶다고 하면
“오래 살고 싶어서요?” 하고 묻는 사람 많다.
그런 분은 아마 인생 편하게 살아온 분일지 모른다.
나는 오래 살고 싶은 마음 없다.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
내가 나로서 존재하며 하나님께 가기를 소망할 뿐이다.
어려운 소망인지도 모른다.
)

그렇다 보니
하나님의 이름을 들어
종교적인 세계, 교계에서, 소위 말하는
영적인 의욕, 야망이 보이는 사람이
눈에 보이면 아주 싫은 경향이 있다.
마음이 비뚤어져 있는 것일까?

[출애굽기 20:7 ]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나 여호와는 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

이 구절의 의미를 나름대로 이해하는 것은 그런 이유가 있어서라 생각한다. 

대학 이후의 이야기는 또 다른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아버님은 더 어려운 세월을 보내셨다.
아버님을 원망할 수 없는 이유이다.
일제 치하에서
빈농의 장남으로 태어나셔서
공부는 하고 싶은데
할아버지는 공부하지 말고 농사지으라고 하시니
(장남이니까)
일본 담임선생이 학비 대줘서
겨우 소학교 마치고
농사가 적성에 안 맞아서
다른 많은 분처럼
만주로 이북으로 떠돌아다니다가
평양에서 식당을 성공적으로 했는데
38선이 막힌다고 해서
다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왔는데
물론 평양에서 번 러시아 돈은 휴지가 되었고
625사변이 터져서
등등… 으로 사시다가
이승만, 박정희,…김대중을 지나서…
돌아가셨다.
내가 어떻게 아버님께 불만을 하겠는가?

잘은 모르지만 내 조국 대한민국은 지금
물질이라는 측면에 있어서는
역사상 최고로 잘 살고 있다.

그런데 왜, 지금은
희망이 없는 것처럼 보이고
희망이 없는 것처럼 말하고
희망이 없는 것처럼 행동할까?
아버님도 사시고
나도 살았고…
그랬는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신 명령은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로 진리가 아니겠는가?

너에게는 정직과 진실을 요구하지만
나에게는 특권을
거짓을 말할 특권을
진실을 왜곡할 특권을
직접 간접적으로 주장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우리는 희망을 느끼기가 어렵다.

쓰고 보니 우울하다.
내가 선각자도 아니고…
그런데 이런 글을 써도 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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