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을 때 감동이 없었어도 (2) 죄의 통회?
[요한 1:12-13]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 로서 난 자들이니라
[요한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로마 10:9-10]
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내가 알고 있는 구원에 관한 중요 성경 구절들이다.
이것들에는 죄를 회개(심각하게?) 한다는 내용은 없다.
그것이 필수 요소라면 그것을 쓰셨을 것이다.
“그러면 죄를 회개하고 구원 받는다는 것을 무시하는 거냐?“ 라고 내게 질문 할 수 있다.
당연히 무시하지 않는다. (죄를 심각하게 뉘우치고)
하나님께 나와 예수님을 구주로 모시고 구원 받는 것 참으로 좋은 일이다.
그러나 구원의 핵심을 다루는 성경구절에는 (죄를 뉘우치는) 이 부분은 강조 되지 않는다.
그런 이유로 그것을 혹시라도 구원의 필수 요건에 명시적으로 암묵적으로 추가 하는 것을 반대한다.
최소한의 필수 요건에
사람에 따라, 다른 그 무엇이 이미 더해진 것은 결코 잘못 이라 비난 하지는 않는다.
다른 그 무엇이 있어야 주님 앞에서 구원을 받는다는 느낌을 혹시 조장하거나 원칙 삼는 것을 배격한다.
심한 예로 “예수님 믿고 세례 받아야 구원 받는다“하면 그것도 반대다. 물론 세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구원의 조건을 언급한 말씀에 없다.
나는 예수님을 구주로 모시고 세례 받았다.
그 뒤에 형태상으로는 물속에 들어갔다 나오는 침례가 더 합당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나는 침례를 받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고 그것을 선언하기 위해서 하나님과 성도들 앞에서
그 믿음을 고백하는 표로 물을 머리에 떨어트려 세례 받았다.
또 예수께서 나의 주님이시라는 고백을 신자 불신자 앞에서 기회 있을 때 마다 한다.
그래서 다시, 주님을 모신다는 행위의 선언을 배격한다.
필수조건이라고 주장한다면 더욱 배격한다.
어찌 처음 믿고 모신 주님과의 그 귀한 기억을 부정하고,
비록 형식일 지라도 그것을 되돌린다는 말인가?
그런 것을 요구하는 조직이나 사람은 스스로 정한 규정을
거꾸로 강요하는 것과 다름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그렇게 해야만 일원이 된다고 주장하는 조직에 참여를 거부한다.
독선 배타적 모습이 보인다.
사도 바울이 배격한 “할례” 받아야 구원 받는다는
유대 주의자들의 그릇된 주장과 별로 다르지 않다고 본다.
나는 이와 유사한 경험을 두 번 했고 그 중 한번은 매우 쓰라린 경험이었다.
요한복음 5:24에 “내 말을 듣고”에는
(1) 내가 죄인이고
(2) 하나님의 생명에서 끊어졌으며
(3) 예수께서 나의 죄를 위해 대신 죽고 부활 하셨으며
(4) 그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구원)
이런 내용이 포함 되어있다 고 생각한다.
내가 무기력한 죄인임을 인정하는 것이고
예수님의 크신 은혜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믿고”에 해당하는 말 인데
거기에 “심각한 죄의 통회” 혹은 “회개”가 지나치게 강조되어
복음을 초점을 흐리는 것은 별로 좋지 않다.
주님의 크신 은혜를 느낄 때 죄는 밝히 드러나며 그 죄를 미워하고 통곡 하게 될 것이고
반대로 내 죄 된 모습이 드러날 때 주님 앞에 통곡하며 엎드리게 될 것이다.
누구는 일찍 깨닫고
누구는 늦게 깨닫는다. (나처럼 둔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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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6회에 걸친 내 이야기
(1) 영접하는 자
(2) 죄의 회개?
(3) 쓰린 추억 – 심각한 죄의 회개
(4) 회개. 왜 그게 인상 깊을까?
(5) 언제 구원 받았을까?
(6)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