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1 (히브리인이 아닌 축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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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문맥(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를 쓰고나서
뭔가 부족한 느낌이 들어서 씁니다
1. 히브리인이 아닌 축복
2. Me Brews?
2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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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성경의 한 책 히브리서 참 좋은 책입니다. 

그리스도인 믿음을
격려하는 내용의 매우 아름다운 명문이 참 많습니다. 

이 책을 쓰신 분은 믿음이 뛰어나실 뿐 아니라
매우 유식하고 문장력이 뛰어난 분이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이 아름답고 멋진 성경을 읽으면서
무언가 가슴이 불안하고 답답할지도 모릅니다. 

다음의 구절들 때문입니다.
난해 구절이기도 합니다.
 

[히브리서 6:4-6]
4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바 되고
5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6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히브리서 10:26-27]
26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 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27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히브리서는 모두 13장인데
핵심인 것 같은 중간 부분을
6장 앞부분과 10장 뒷부분이 마치 “(” 와 “)” 로 둘러싸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 = 히브리서 6:4-6
“)” = 히브리서 10:26-27 

(1장 – 5장) 과 (11장 – 13장)은
내용이 직설적이며 아름답고 은혜로워서
“아멘. 감사합니다.“ 하면서 읽기에 무난합니다. 

중간에 히브리서 3:12-14 가 좀 걸리지만 큰 문제 아닙니다.
“정신 차려 경건하게 살자” 정도로 이해하면 될 듯합니다.
[히브리서 3:12-14]
12 형제들아 너희가 삼가 혹 너희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할 것이요
13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
14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되리라 

그런데
(히브리서 6:4-6) (히브리서 10:26-27) 사이에 있는 내용들은
논리적인 단계 단계를 밟아서 뭔가 말을 하고 있어서논리적인 단계 단계를 밟아서 뭔가 말을 하고 있어서
“(” = (히브리서 6:4-6) 과 “)” = (히브리서 10:26-27)은
우리 마음을 무겁게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내가 주님으로부터 은혜를 받은 후
(기도의 응답 받고, 성령으로 방언도 하고 .. 등등)
혹시나, 주님을 배반하고, 타락하여, 구원을 잃고,
맹렬한 불만 기다리는 그런 존재가 되면 어찌하나?“하는
두려움이 감히 밖으로 말은 안 해도 마음에 도사리고 있는 것입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우리는 자기가 부끄러운 죄를 짓고 살았던 것,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지 않은 듯이 위선적인 태도로 살았다는 것도 압니다.
그렇지 않으면 양심이 무딘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히브리서를 읽으면
(히브리서 6:4-6) 과 (히브리서 10:26-27)이 마음에 걸리는 겁니다.
누구에게 물어 보자니 내 마음속의 부끄러움을 내어 보이는 것 같고. 

그래서인지 히브리서 강해가 많은 데…
저도 감히 히브리서에 도전해 보겠습니다.
그냥 야인에 불과한 제가 말입니다.
(이것은 “성경을 문맥을 따라 이해하자“의 연장입니다) 

시작합니다. 

히브리서 그 13장중 1-10장에서
히브리서의 저자는 절절히 외칩니다. 

“예수는”
“대제사장”,
“모든 것 위에 뛰어나신 분”,
“영원한 속죄의 제물”,
“그리스도다”,
“메시야다“
“예수를 믿어라”
“아니면 맹렬한 하나님의 진노다”


왜냐하면
 

(히브리서의 전제 조건)

히브리서를 읽는 동족 히브리인 성도(?)들이
(히브리서 저자 보기에는 참으로 안타깝게도)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예수 믿으라고 자꾸 그러니 한번 믿어 볼까?”
“예수 믿으면 죄 용서 받아?”
“아닌 것 같은데?”
“죄 용서받으려면 염소, 양 가지고 제사장에게 가서 제사 드려야 용서받지”
“모세 때부터 1000년도 더 오래 했잖아?”
“모세오경(토라)에도 줄줄이 써있잖아?”
“그런데 어떻게 예수 믿으면 죄 사함을 받아?”
“내참!”
“아! 빨리 속죄 제사 드리러 가야겠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속죄의 제사가 천여 년 간 골수에 뇌리에 박혀있다는 말입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믿음 연약한 분도 많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 호의를 가지고 있지만 믿을까 말까하는 분도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고 있는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믿음이 견고한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들여다보면 여러 종류의 믿음의 상태를 지니고 있었을 것입니다.
믿지 않았거나, 의심이 있거나,
그 믿음이 연약한 분이 많았다고 짐작할 수있습니다.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오늘 날 교회에도
교회생활 오래한 분,
진실히 열심히 믿는 분,
한번 믿어 볼까하고 온분,
누가 열심히 권해서 와 주신 분,
문제 해결 되고 복 받을까 해서 온 분,
마음 아픈 분,
몸이 아픈 분, 

이런 모든 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살게 되어야 하고
교회가 제 역할을 하는 것 일 것입니다. 

히브리서의 수신인은 주로 히브리인 이며
당연히 유대인의 역사 구약에 정통하고
율법 특히 속죄의 제사 제도를 매우 잘 알고 열심이며
오늘날 교회처럼 여러 신앙 수준의 사람들이 다 있었고
믿음은 대부분 어린아이 수준일 것이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6:1-2]을 보면
1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2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 나아갈지니라 

그리스도 도의 초보인
“죽은 행실을 회개함”=“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그리고
기타 기본적인 교리들을 잘 모른다는 겁니다.
(구약만 정통해서는 예수님을 통한 구원 알기 어렵기 때문일 겁니다) 

[히브리서 11:6]을 보면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하나님께서 살아 계신 것도 알쏭달쏭한 분 있다는 말입니다.
(저도 이분들이 그렇다는 것이 놀라운데 히브리서 저자는 그렇게 썼습니다) 

그래도
예수님 믿기 전 사도 바울 보다는 못할지 몰라도
구약 성경을 아주 잘 알고, 율법에 정통하고,
하나님께 열심인 사람들이었을 겁니다. 

그것은 사도행전에 예수님을 믿은 유대인들이 이방 교회를 다니며
할례를 받고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한다고 가르치고 다닌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15:1]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하니
[사도행전 21:20]
저희가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바울더러 이르되 형제여 그대도 보는 바에
유대인 중에 믿는 자 수만명이 있으니 다 율법에 열심 있는 자라 

예수님 믿지 않은 사람도 상당히 있었을 겁니다.
[롬 10:1-2]
1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함이라
2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그렇지만
행실이 경건한 사람들이 많아 세상 죄와는 거리가 먼 분들이었을 겁니다.
죄를 지으면 염소, 송아지로 대 제사장에게 가서 속죄의 제사를 드려야한다 믿고
그것을 조상대대로 실천하며 살아온 사람들이니
이교도 이방인들처럼 죄를 많이 짓고 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방인 그리스도인들과 두드러지게 다른 특이한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반면에 이방인 그리스도인은 예수님 믿는다면서도 죄를 짓고 사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고린도전서를 읽어 보십시오)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의 기초는(죽은 행실을 회개함 등) 약하지만
성경(구약)의 지식과 실천에 있어서는
이방인 그리스도인은 도저히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한 사람이었을 겁니다. 

게다가 유대인은 천여 년 이상 핍박을 받아 왔는데
그리스도인을 향한 박해가 또 다시 예상 되는 때였습니다.
 

(
이것이 제가 생각하는
히브리서 이해의 전제조건입니다.
가정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모든 논리, 이론은
전제조건을 근거로 전개 됩니다.
이 전제조건이 거짓이라면
이제부터 제 말은 진실이 아닙니다.

저는 이 전제조건의 진실 여부를 증명하지 않으며
그것을 증명할 능력도 없습니다.
그 진위의 증명은 성서 역사학자, 고고학자의 몫입니다. 

학술적, 객관적 증거에 의하여 저의 가설, 가정, 전제 조건의 잘못이 밝혀지면
저는 전제조건을 바꾸어서 다시 히브리서를 이해하려 할 것입니다. 

그 전제조건을 기본으로 해서 전개한 해석이
이미 증명된 원리와 모순 없이 일치하면
그 전제, 가정은 참이라는 것이 간접적으로 증명되는 것입니다. 

그 전제조건에서 유도된 결론이 기존의 진리와 모순되어도 그것을 버리고
저는 전제조건을 바꾸어서 다시 히브리서를 이해하려 할 것입니다.
저는 이런 접근 방법을 좋아합니다. 

객관적 진실과 관계없이 그 전제와 결과를 진리이라 고수하면 그것은
Frame, Paradigm, Dogma 가 된다고 생각하며 나쁘다고 생각합니다. 

나에게 Dogma가 있다면
“해석의 최종적 권위는 성경에 있다“
“모든 이론은 성경의 권위, 선언 앞에 굴복해야 한다”입니다.

귀동냥으로 오다가다 들은 말들을 인테넷 보고 썼으니
틀린 말들 많이 있을 것입니다.
꼭, 지적해 주시기 부탁드립니다.
) 

이런 히브리 교인들에게
편지를 쓴다면 어떤 내용을 써야할까요?

저의 전제조건에 의하면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믿음”과
“건전한 믿음의 성장”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저자는
자기 동포가 예수께서 그리스도 구세주이심을
깜빡 깜빡하고 다시 옛날 속죄 제사로 돌아 갈까봐
구원의 주님이신 그리스도를 거부 할까봐서
여러 번, 이렇게, 저렇게, 강조하고 또 강조합니다.

(그들 중 아직도 예수님 믿지 않는 사람 많으니) 

 

(히브리서 전체 요약)

1-10장
예수는 그리스도, 예수는 그리스도, 예수는 그리스도
“예수님을 그리스도 속죄의 구세주로 믿어라”
“믿지 않으면 하나님을 떠나 영원한 형벌이다“ 

11-13장
믿음과, 믿음 후의 시련, 성도의 생활 지침 등을 교훈 합니다. 

(장별 요약)

1 장
(1:2) 예수그리스도로 모든 날 마지막에 말씀하셨다
(1:3) 예수그리스도는 창조주 하나님이시다
(1:4) 예수그리스도는 천사보다 뛰어나시다
등등

2 장
(2:3) 에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무시하면 하나님의 형벌을 피할 수 없다.
(2:14) 에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참 사람이 되셨다
(2:17, 4:14-15) 그리스도는 속죄 죄를 위한 대 제사장이 되셨다 

3 장
(3:2) 예수 그리스도는 모세보다 뛰어난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 제사장이다.
(3:11) 모세의 말에 불순종한 이스라엘은 안식에 못 들어갔다
(3:12)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안 믿으면 살아 계신 하나님으로 부터 떨어진다. 

(3:17-19) 모세 따라다닌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이 믿지 않아 가나안 못 갔다.
너희는 믿지 않는 악심을 품지 말고 예수그리스도 믿어라
(믿지 않는 사람 있다는 뜻) 

4 장
(4:2) 복음 전함을 받아도 듣고 믿음으로 화합하지 않으면 그 들은 말씀이 유익되지 못한다.
그러니 에수 그리스도를 믿어라
(4:14) 예수는 큰 대 제사장이시다 

5 장
(5:12) 오래 되었어도 (히브리인들이) 하나님 말씀의 초보(구원, 세례 등등)도 잘 모른다. 
신앙의 어린애다. (제사 율법에만 매어있으니) 

6 장
(6:1-3) 그리스도 도의 초보 개념(구원, 세례 등등)을 뛰어 넘어서라.
믿었다고 말하고서 율법에 얽매어 옛날의 속죄 제사로 돌아가지 말라. 

(6:4-8) 어려운 구절(?)
4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바 되고
5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6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그렇게 말하고 보여줘도 타락 (염소, 양을 잡아 드리는 속죄 제사) 하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이는 것이다. 

성도들이 하나님의 선한 말씀 내세의 능력 누리는 것을 (맛)보고도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자들”은 해결책이 없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하면, 그리스도의 대속을 거부하고.
구약시대처럼 염소 송아지로 속죄의 제사를 드리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이는” 행위가 되는 것이다.
그것을 종식시키려고 주님께서 속죄 제물로 십자가에 달리셨는데 그것을 무시하니까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을 거부하는 것이니 회개의 기회란 전혀 없는 것입니다.
그보다 중한 죄가 없는 것입니다.
(이방인은 이 말을 이렇게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히브리인 성도들은 즉시로 그렇게 이해를 했을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믿음으로 받으라는 말씀입니다. 

다른 한편,
“한번 비췸을 얻고 … 타락한 자”가 히브리인인 까닭은 성경에 예언했듯이
그들이 율법, 제사제도에 강하게 집착하고 있어 눈으로 보아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속죄의 제사임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이미 이것을 말씀하셨고,
히브리서 저자는 그 사실을 머릿속에 생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성경에 근거한 저의 추측입니다)
[마태복음 13:13-15]
13 그러므로 내가 저희에게 비유로 말하기는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14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15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그렇지만…
[히브리서 6:9-12]을 계속 읽으면
9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같이 말하나 너희에게는 이보다 나은 것과 구원에 가까운 것을 확신하노라
10 하나님이 불의치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 하시느니라
11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12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 

히브리서를 읽는 히브리 교인들은 그럴 리가 없다는 겁니다.
“너희에게는 이보다 나은 것과 구원에 가까운 것을 확신”한다는 거지요 (9절).
(예수님은 아직 안 믿는 분 많은 것 같습니다. “구원에 가깝다“고 합니다)
게다가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선한 삶을 살고 성도들을 섬겼습니다” (10절).
그러니 대놓고 말은 안 했지만 “예수그리스도의 대속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라“
강하게 외치는 겁니다.
히브리 교인들은 다 알아 들었을 겁니다. 

그러면
[요한복음 10:28-29] 의 주님의 선언과도 아무런 충돌 없이 이해됩니다.
28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29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7, 8 장
(22-23) 예수 그리스도는 새 언약의 완벽하고 영원한 대 제사장 이시다 

9 장
(12-14, 28) 예수 그리스도는 대 제사장 겸 제물이 되어 자신의 피로 속죄 제사를 드리셨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가 아니다. 

 


10 장
(14-17) 예수님의 속죄 제사를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고 용서하시고
우리의 죄를 기억조차 않으신다고 했다.
(10:18) 그러니까 다시 염소, 양을 잡아 속죄의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다.
(그렇게 하면 절대로 안 된다는 말이다) 

(26-31) 진리를 아는 지식을 알고도 믿지 않고 염소, 양을 잡아
속죄의 제사 드리면 하나님의 심판, 맹렬한 불밖에 없다.


“진리를 아는 지식 =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이 진정한 속죄의 제사이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이 대 제사장 겸 제물이 되어서 드린 영원한 속죄의 제사라는 겁니다.
세례요한의 선언과 같습니다.례요한의 선언과 같습니다.
[요한복음 1:29]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만약에, 만약에
이것을 무시하고 염소, 양 잡아 속죄의 제사를 또 드린다면
(많은 유대인은 그렇게 할 겁니다) 

마치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도 베드로가 예수님께
“선생님 대 제사장에게 염소 가지고 가서 속제 제사를 드리겠습니다“하는 것과 같습니다.
가롯 유다의 예수님 배반 이상의 영원히 용서받지 못할 죄인 것입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하시고 지금도 영원히 살아 계시다고 믿는다 하면서
제사장에게 가서 양으로 속죄 제사를 드리겠다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눈앞에 두고 멸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메시야가 아닌 죄인이라고 하며 그 얼굴에 침 뱉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밖아 현저히 욕보임이라고(히브리서 6:6)” 말한 것입니다.
영원히 용서 받지 못할 지옥의 불이 기다리고 있는 죄라는 겁니다.
매우 자연스러운 이해입니다. 

이것을 믿고 살다가 미래 언제인가 주님을 배반해서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현저히 욕보임” 이라고 이해하면 억지가 됩니다.
내가 믿음을 떠난 것이 예수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다는 것은 논리의 비약입니다. 

그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대속을 무시하고 양을 잡아 제사를 드리면
예수님의 십자가가 구원을 받는 데 효력이 없다고 인정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란 말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말합니다.
만일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이 한시적 효과가 뿐이라면
예수님께서 여러 번 십자가에 달리셨을 거라구요. 

[히브리서 9:26]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그러므로 히브리서에 나오는 영원히 용서받지 못할 죄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의 은혜를 거부하는 죄입니다.
성경의 다른 부분의 교훈과도 아무런 모순, 갈등이 없습니다. 

이방인들은 이런 속죄의 제사를 드려본 일이 없습니다.
이방인 그리스도인에게는 전혀 해당되지 않는 말씀이라는 말씀입니다.
소, 양을 잡아 속죄의 제사를 드리는 것은 아예 개념조차 없습니다.
이방인(우리)은 또, 속죄 제사를 드린다고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 믿은 후 배반하는 것이라고 오해하는 것이지요.)
저도 그랬습니다. 

이렇게 이해하면 히브리서의 그 다음 장들은 문제가 없이 이해가 잘 됩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속죄의 제사를 힘들여 잘 설명했기 때문에
생활 속의 죄가 적으며 고난을 오랜 동안 헤쳐 온 히브리인 성도들에게는
경건, 고난의 대비, 경건한 생활 지침 뭐 이런 것들은 그냥 설명만 하면
아멘, 아멘 하고 받아들일 겁니다. 

반면에 이방 그리스도인들은
이런저런 죄, 생활의 규모 없음, 양심의 불량 등 구구절절 가르칠 것들 참 많습니다.
평소에 죄 가운데 살아온 사람 많아 죄 짓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거든요.
이래저래 히브리서는 특이한 서신입니다.
히브리서의 일차 수신자가 이방인 그리스도인이라 생각하며
읽으면 그래서 논리적 무리가 온다 생각합니다. 

11장
믿음의 조상들도 율법, 제사 아니고 믿음으로 죄의 사함(의롭게 됨) 받고 살았다.
그런 분들이 아주 많이 계시지 않느냐?
그러니까 너희들도 힘을 내어 믿음으로 살아라

12장
(12:1-3) 그 믿음의 대상이 믿음의 주 예수그리스도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고난, 두려워 말고 연단 받는다고 믿으라 

13장
그리스도인의 생활 권고… 이렇게 저렇게 살아라
이렇게 이야기가 무난하게 흘러갑니다. 

 

(히브리인이 아닌 축복) 

히브리인이 아닌 우리 이방인들은
히브리서 1-10장까지를 읽으면서
염소, 양 잡아서 제사 드리는 것같은 복잡한 그런 것 하지 않아도지 않아도
(그런 이야기 해주어도 느낌이 안 오고 모릅니다) 

그냥, 저처럼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그냥 믿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여 구원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이런 크신 값없는 은혜와 축복을 주셨으니 

“아! 주님의 은혜는 신기하고 놀랍다”
“아멘 아멘 할렐루야”
“주님을 찬양합니다”
“주님을 사랑합니다” 

하면 되는 겁니다. 

이런 관점에서 이방인으로 태어난 것은 축복입니다.
예수는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믿으세요. 

이것이 바로
“히브리인이 아닌 축복“
입니다. 

(1)
구주의 십자가 보혈로 죄 씻음 받기를 원하네
내 죄를 씻으신 주 이름 찬송합시다 

(후렴)
찬송합시다 찬송합시다
내 죄를 씻으신 주 이름 찬송합시다 

(2)
죄악을 속하여 주신 주 내 속에 드어와 계시네
십자가 앞에서 주 이름 찬송합시다 

(3)
주 앞에 흐르는 생명수 날 씻어 정하세 하시네
내 기쁨 정성을 다하여 찬송합시다 

(4)
내 주께 회개한 영혼은 생명수 가운데 젖었네
흠 없고 순전한 주 이름 찬송합시다 

그냥
예수 그리스도는 구세주이시다.
믿기만 하면 됩니다
이것과 같은 축복이 없다는 것을 느낍니다. 

유대인은 하나님 앞에서 열방의 제사장으로 택함 받은 민족인데
그 역할을 저버리고 나니
자기들에게 주신 하나님 약속대로 나오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조차도 이렇게 어려웠다는 말입니다.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리라” 라고 공개적으로 외친 결과가 아닐까요?

[마 27:24,25]
24 빌라도가 아무 효험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가로되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25 백성이 다 대답하여 가로되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하거늘 

히브리서의 기자는
머리를 쥐어 짜내고 피를 토하듯이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동족에게 변증합니다. 

그래서 골수 히브리인들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염소나 양을 잡아 속죄의 제사를 드리면
영원한 하나님의 진노”
라는 것을 이해했을 겁니다.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히브리서를 읽으면 오해하기 쉽습니다.
역사 문화적인 배경이 달라서 그렇지요. 

이방인은 자기가 복(재물, 돈) 받기 위해서
이기적인 태도로 (남을) 희생 제물로 드리고 제사하지
자기의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 희생 제물로 제사 드리지 않았거든요.
속죄 제사 드려서 죄를 용서 받는다고 느끼기 매우 어렵습니다.
(
이방인의 제사 개념이 이기적이고 악합니다
이방의 제사는 음란하고 난장판 이지요
말하자면 음란 파티 같은 게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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