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2 (Me Brews?)


히브리서의 전제 조건을 바꾸겠습니다


히브리서를, 로마서처럼
우리 같은 이방인에 썼다고 가정합니다.
(그러면 히브리서가 아니겠지요?)

지금은 비 히브리인(이방인)이 훨씬 더 많이 성경을 봅니다.
그 비 히브리인은 히브리서를 읽으면서
마치 이 서신을 읽는 자기가 히브리서의 수신자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 편지가 내게 온 편지로 자연스럽게 읽습니다.
(바람직한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이방인)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리스도인이란 그 이름이 의미하듯이
믿음이 연약한 사람도 견고한 사람도 있겠지만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구세주라는 명제와 믿음에는
마음속으로부터 동의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인정한 사람들입니다.
기본적인 믿음(구원)은 최소한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구약성경의 양, 염소를 잡아 드리는 속죄의 제사는
해본 적 없고 전혀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모른다고 보면 됩니다.

이 분들이 이 히브리서를 읽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서에는 양, 염소를 잡아 드리는 속죄 제사가 많이 나옵니다)

1 장
(1:2) 예수그리스도로 모든 날 마지막에 말씀하셨다
(1:3) 예수그리스도는 창조주 하나님이시다
(1:4) 예수그리스도는 천사보다 뛰어나시다 등등

2 장
(2:3) 에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무시하면 벌을 피할 수 없다.
(2:14) 에수 그리스도는 너희를 구원하시려고 참 사람이 되셨다
(2:17, 4:14-15) 그리스도는 속죄 죄를 위한 대 제사장이 되셨다

별 문제없이 술술 읽을 수 있습니다.
비록 구약은 잘 몰라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3 장
(3:2) 예수 그리스도는 모세보다 뛰어난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 제사장이다.
(3:11) 모세의 말에 불순종한 이스라엘은 안식에 못 들어 갔다

(3:12) 형제들아 너희가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할 것이요

여기서(3:12) 주춤 하게 됩니다.
“어 나는 예수님을 믿고있는데…?”
“믿지 않는 악심을 품어? 내가 예수님을 배반할지도 모르나?”
이런 의심이 들지만 마음이 약간 무거운 채로 계속 읽어갑니다.

(3:17-19) 모세 따라다닌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이 믿지 않아 가나안 못 갔다.
“어 나도 예수님 믿었다가 믿지 않는 악심을 품으면 천국 못가나?“
이런 생각을 또 하게 됩니다. (성경에 써있으니까)

4 장
(4:2) 복음 전함을 받아도 듣고 믿음으로 화합하지 않으면 그 들은 말씀이 유익되지 못한다.
“어 나는 복음 전함 받고 믿었는데, 내 믿음은 진실한가 ?”
의심하고 자기를 돌아봅니다.
(별 문제는 없는 듯해도 그래도 마음이 거북합니다)

5,6 장
(5:12), (6:1-3) 오래 되었어도 하나님 말씀의 초보(구원, 세례 등등)도 잘 모른다.
“내가 받은 구원의 기본을 내가 잘 모르나?”
“그동안 나는 내가 예수님 믿어 구원 받았다고 믿고 있었는데?”
“구원에는 더 심오한 뭔가가 있는데 내가 모르는 건 아닌가?”
생각하게 됩니다.

(6:4-8) 어려운 구절(?)
4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바 되고
5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6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충격적인 구절이 등장합니다.
변절, 믿음의 배반을 경고하는 것이라는 말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 구절은 (히브리서 6:1-3) 과 (6:9-12) 의 문맥이 부드럽게 흘러가는
믿음을 격려하는 아름다운 내용 사이에 끼어있습니다

[히브리서 6:1-3]
1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2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 나아갈지니라
3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

[히브리서 6:9-12]
9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같이 말하나 너희에게는 이보다 나은 것과 구원에 가까운 것을 확신하노라
10 하나님이 불의치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 하시느니라
11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12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

믿음을 격려하는 내용이 흘러가는 문맥의 중간을 자르고
배교의 심각한 경고(?)가 들어간 것입니다.

정말 이상해 보이지 않습니까? 왜 그럴까요?
이것이 제가 주장하는 문맥을 따라서 성경을 읽어야 한다는 이유인 것입니다.

6:1-3. 9-12절을 보면 배교의 경고와는 달리 믿음을 격려하고 있거든요.
“하나님 허락으로 완전한 믿음으로 나아가고”
“너희에게는 결코 그렇지 않다” 즉 “나쁜 일 없다”는 거지요.

(6:1-3), (6:9-12)의 격려하는 문맥과 전혀 무관하게도
(6:5-8)의 “ 배교에 대한 경고“로 보이는 내용이 끼어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만일, 제가 친구들에게 이렇게 논리의 변화가 심한 말을 이어서 한다면
듣는 분이 어떻게 생각할까요?
제 말의 흐름이 아주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히브리서 기자가 그렇게 이상한 논리의 흐름으로 말을 했을까요?

“배교 = 믿음을 배반한다“는 생각이 문맥의 흐름에 큰 무리가 있는 겁니다.

그리고 성경은 대부분 주님께서 이루신 “영원한 구원”을 큰 소리로 선언한다고 볼 수 있는데,
그 영원한 구원을 잃는다는 내용을 단지 몇 구절로 말하고
히브리서의 기자가 말을 끝낸다는 것도 매우 이상하지 않습니까?

주님의 직접적인 선언(요10:28)을 정면으로 반대하는 것인데요?
히브리서 기자가 주님의 선언을 큰소리로 반대할 정도로 위대한 분입니까?
[요한복음 10:28,29]
28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29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그런데 이 내용(6:4-8)만 문맥에서 딱 잘라내어서 주장하는 분들 많은 듯합니다.
그러다 보니 뭔가 미흡하니까 여러 가지 다른 이야기를 더 해야만 합니다.

제 의견에 이 구절을
교회 다녀도 (다른 성도들이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 누리는 것을 보고도)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자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한, 해결책이 없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만 된다. 이렇게 생각하면 부드럽게 이해가 되지만
그래도 많이 억지스럽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인들(이방인도)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만약에 만약에 (가정입니다) 염소 송아지로 속죄의 제사를 드리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을 정면으로 거부하는 것이며 (당연하지요)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이는” 행위가 된다는 것입니다.

죄의 형벌을 종식시키려고 주님께서 속죄 제물로 십자가에 달리셨는데
그걸 대놓고 무시하는 것은 (구약의 속죄 제사드리는 것)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을 거부하는 것이니 회개의 기회란 전혀 없는 것입니다.
그보다 중한 죄가 없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인 성도들은 즉시로 잘 이해를 했을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믿음으로 받으라는 말씀입니다.

히브리서를 읽는 히브리 교인들은 그럴 리가 없으니
“너희에게는 이보다 나은 것과 구원에 가까운 것을 확신”한다는 거지요 (9절).
(그들 중 예수님을 아직도 안 믿는 분 많은지구원에 가깝다고 합니다)
게다가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선한 삶을 살고 성도들을 섬겼습니다” (10절).
그러니 대놓고 말은 안 해도 “예수그리스도의 대속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라“
히브리인 교인에게 강하게 외치는 겁니다.
히브리 교인들은 다 알아 들었을 겁니다.

이렇게 이해하면
요한복음 10:28,29의 주님의 선언과도 아무 충돌이 없이 이해가 됩니다.
[요한복음 10:28,29]
28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29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그런데 …
구약의 제사 제도를 모르는 이빙인 그리스도인들은 이 대목이 너무나 혼란스럽습니다.
문화와 전통의 커다란 차이 때문입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당시 이방인 교인은 구약성경 특히 제사제도 “레위기” 아는 분 거의 없을 겁니다.
우선 성경(모세오경)을 구하기 어렵고, 구해도 못 읽을 것이고, 그러니 속죄의 제사?
아무 생각 없었을 겁니다.
이글을 읽는 분께 묻습니다. “레위기” 읽기 쉽고 이해 잘 되고 재미있습니까?
저는 예수님 처음 믿고 성경을 읽을 때 레위기는 지루하고 어려워 안 읽고 지나갔습니다.

그것(속죄 제사라는 것)이 마음으로부터 이해가 안 되니까
“배교”, “은혜에서 떨어짐” 등등의 기발하고 모순된 이론, 가설이 나오는 겁니다.

즉, “예수 믿어 구원 받고 있다가 믿음을 버리고
또 다시 죄에 빠지면 다시 속죄함이 없고 지옥에 간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느낌상으로는 이해가 됩니다.
또 현실에서 믿음을 배반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아왔습니다.
(우리의 불행한 현실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면 그 다음에 너무나 머릿속이 혼란스러워 집니다.
우리 주님의 요한복음 10;28-29의 선언과 정면으로 충돌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생각 끝에
“예수 믿어 구원 받고 있다가 믿음을 버리고 또 다시 죄에 빠진다” 라고 하는
다른 하나의 전제 즉 “배교”라는 개념을 여기에 도입한 것입니다.
“배교는 속죄의 여지가 없다” 라고…

원래 믿고 있던 요한복음 10:28-29의 선언과 대치되는 말이
자신이 새로 주장하는 말에 나오니까
자기주장에 타당성을 주기 위해서는
요한복음 10:28-29의 주님의 선언을 대치할
또 하나의 다른 강력한 가정이 필요하게 됩니다.
물론 이 가정은 직접적인 성경의 언급이 없습니다.

이 간접적인 가정으로 주님이 직접 하신 선언을 대치하는 것입니다.
즉 나의 가설을 정당화하기 위해 주님의 직접 선언을 무시하는 겁니다.
그것도 “내 손(예수님), 아버지(하나님)의 손“이라고 주님께서 선언하신
두겹의 안전장치를 완전히 무시하고 말입니다.
믿음으로 성경을 이해한다고 하면서 말입니다.

He Brew서가
Me Brew서,
You Brew서
되어 갑니다.

(
사람(학자)들이 빠지기 쉬운 오류는 자기 가설의 정당화를 위해
기본 원칙을 무시(뛰어넘고)하고 싶은 강한 유혹을 받는다는 겁니다.
무리한 개념, 증거를 도입하기 쉽습니다.
자연과학자는 종종 실험 데이터를 조작 합니다.
인문 과학자, 신학자는 어떨까요? -저는 잘 모릅니다만-

학자에게는 어떤 학문이든지 학자적인 양식이 요구 됩니다.
신학자가 성경에 대한 믿음보다 신학을 우선한다 해도 이해하겠습니다.
학자가 학문을 가장 우선하겠다는 데 뭐라겠습니까?
사업가가 돈 벌겠다는 거나 다를 바가 없으니.
그러나 학자적인 객관적 논리의 정직성은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상식적 혹은 감성적으로
이제 예수님을 구주로 믿은 성도들의 신앙을 격려해야하는 편지에…
믿은 지 오래 되고 매너리즘에 빠져 주님을 배반하는 것에 대한 경고를 한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자녀 보다 내 가설을 더 중요하게 여겨 나온 (그릇된) 결론입니다.

초등학교에서 교육을 하면서
“너희들 앞으로 잘 해야지 정부에 대들면 감옥 보내고 사형이야“하고
협박하는 것과 같습니다. 논리적으로 이해하기 매우 어렵습니다.
그런 정부는 독재 정부이며 그런 신이라면 이방 종교의 거짓 신일 것입니다.

또한 배교에 관한 언급은
히브리서 이외의 성경을 보면 모두다
구체적으로 누구누구 이름을 들어가며 배교자 누구누구를 주의하라.
이런 저런 배교, 이단을 주의하라고 구체적인 사람, 집단을 지적했지

어린 그리스도인에게 배교라는 특정 사건이 생기기 전에
일반적 교훈으로 미리 배교를 경계한 적은 제 기억에는 없습니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사교에서 행하는 협박성 발언일 것입니다)
배교를 경계하기 이전에 건강한 믿음을 키우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배교에 대한 경고를 신자에게 미리하면, 예민한 사람은…
“나를 잠재적으로 주님 배반하고 지옥 갈 사람으로 보는 거야?”라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그런 말을 신자에게 미리 하는 것은
어린 신자를 주님을 배반할 잠재적 죄인으로 보는 나쁜 태도입니다.

어린 자녀가 아직 죄가 뭔지도 모를 때에
“너 이런 것은 큰 죄야 그럼 나쁜 놈이야. 그런 죄 지으면 감옥 가”라고 가르치시겠습니까?
자녀와 길가다 잘못된 일을 보면 “저것 봤지 저렇게 하면 않돼” 하고 가르치시겠습니까?

이상한 가정으로 자기주장을 정당화하려니까 히브리서 6:5-6이 논란이 되며
난해 구절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기쁘고 즐겁고 마음 푸근해야 하는데
[느헤미야 8:10]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언제 내가 배교할지 전전긍긍하도록 사전에 가르침을 받는다면
그게 무슨 영생이며 기쁨이겠습니까?
교회만 가면 가슴이 답답해서 돌아오게 되는데.
그런 교회 가고 싶겠습니까?
“어디 안 그런 교회 없나?” 하고 찾을 것입니다.
이 말은 듣기 좋은 달콤한 말말 하라는 뜻 결코 아닙니다.

[요한복음 10:29]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이 약속의 말씀은 도대체 무엇인가?
인간의 논리로 하나님의 선언을 무력화 시키지 마십시오.

개역개정 성경에도 히브리서 5:11 앞의 제목에
“변절을 경계하시다”라고 써 있는데
많은 분들이 그렇게 생각한다는 뜻이겠지요.
제 의견에는 명백한 잘못입니다.
(
제가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
저보고 비판만 한다고 할지도 모릅니다

“네까짓게 뭔데?“
“이단 아냐?”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저는 “변절의 경계” 보다는
“구약의 속죄 제사로 돌아감을 경계함”
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

이 구절(히브리서 6:5-6)은
“이렇게 까지 구구절절 애타게 알려 주었는데도
옛날의 염소 잡아 드리는 제사(죄)로 돌아가면 정말 다른 길이 없다.
지옥 불에 들어갈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
제발 그렇게 하지 말고 예수님을 믿어라.

그리고
이것은 내 마음이 급해서 먼저 말했는데
앞으로 더 자세히 설명하고 히10:26 에서 또 말할 것이다.“
라는 말이 내포 되어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원만하게 이해가 됩니다.
요한복음 10:28-29의 주님의 선언과도 전혀 충돌이 없이 이해가 됩니다.
[요한복음 10:28-29]
28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29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논리의 비약 같지만 문맥의 흐름을 보면 이것이 타당합니다.
비약이 결코 아닙니다.

7, 8 장
(22-23) 예수 그리스도는 새 언약의 완벽하고 영원한 대 제사장 이시다

9 장
(12-14, 28) 예수 그리스도는 대 제사장 겸 제물이 되어 자신의 피로 속죄 제사를 드리셨다.

10 장
(14-17) 예수님의 속죄 제사를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고 용서하시고
우리의 죄를 기억조차 않으신다고 했다.
(10:18) 그러니까 다시 염소, 양을 잡아 속죄의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다.

(26-31) 진리를 아는 지식(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제사)을 알고도
안 믿고 염소, 양을 잡아 속죄의 제사 드리면 심판과 맹렬한 불밖에 없다.

또 나옵니다. 그러나, 이방인들은 속죄제사 드려본 일이 없습니다.
이방인 그리스도인에게는 전혀 해당되지 않는 말씀이라는 말씀입니다.
소, 양을 잡아 속죄의 제사를 드리는 것은 아예 개념조차 없습니다.

이방인 제사는 복달라고 신을 (제물 주어) 달랜 후
먹고 마시고 음란 파티하고 이런 것이니 죄짓는 것 자기들도 잘 압니다.
평소에 가끔씩 마음이 찔려있습니다.
고린도 전서 보세요, 교인이면서 아버지의 여자를 데리고 산 사람도 있거든요.

저를 포함한 이방인들은 히브리서 10:26을 처음 생각할 때에,
히브리인들이 그들을 위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을 완전히 멸시하고
염소와 양으로 속죄 제사를 드린다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속죄의 제사 제도 아주 생소합니다. 해본 적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방인의 관점에서 보면 이 구절은
예수 믿은 후 경건하게 살지 못하고 죄를 물먹듯이 짓고 살면
(자기들이 그렇게 사는 경우 많으니까)
“용서 받을 수 없고 맹렬히 타는 불만 기다리고 있다”로 잘못 이해하는 거지요

그런데 그게 요한복음 10:28,29의 주님의 선언과 어긋나니까
예수 믿고 배교하면 지옥 간다는 논리를 무리하게 내세우는 겁니다.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속에 풀 수 없는 갈등을 야기하는 것입니다.
잘못된 거짓 가르침입니다.

(
물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은
과거, 현재, 미래에 모두 효과를 미치는 영원한 속죄이니
예수님 믿어 구원 받은 후 죄를 지어도 좋다는
논리는 더욱 더 악한 논리입니다.
)

교회 가서 이런 가르침 설교 듣고 집에 와서 가만히 생각하니
어떤 죄를 지으면 하나님이 용서하지 않으실 것인가 곰곰이 생각하고
도대체 얼마나 비양심적으로 주님을 거부하고 죄를 지으면 용서 못 받을까 생각하고
그러면 용서 받지 못하기 직전까지는 죄를 지어도 되겠네 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내가 용서 받지 못할 죄지어서 지옥 갈까봐 불안하고
이런 것이 올바른 믿음의 태도이며, 마음의 평안이며 영생일까요?
그런 생각 그런 자세로 하나님 앞에 나오고 교회에 가야할까요?
이 교훈의 모순됨을 말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의 일차 수신인이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 그리스도인이라고 가정을 세운데서 오는 필연적인 결과입니다.
가정에서 유도된 결론이 이미 성립된 기본 진리와 모순이 되면 그 가정을 바꿔야 합니다.
그것을 고수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겁니다.
Dogma, Frame에 매어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을 믿고 나서
예수 그리스도를 나중에 거부 하고 배교한다고 개념을 세웁니다.
또 하나의 잘못된 가정입니다.

그것을 믿고 살다가 미래 언제인가 주님을 배반해서
다시 십자가에 못밖아 현저히 욕보임” 이라고 이해하는 겁니다.
내가 믿음을 떠났다고 예수님이 다시 십자가에 못 박히신다는 것은 논리의 비약입니다.

그리고 이런 주장을 한다면 말입니다.
믿음의 격려해 주어야할 어린 신자에게 배교하면 지옥 간다고 겁주는 것이 됩니다.
논리적으로 뭔가 매끄럽지 못합니다?
출발점(가정)이 잘못되어 점점 어려워지고 이상한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겁니다.

(
공부 못하는 학생이 수학문제 풀 때 틀린 공식을 써서 이상한 답이 나오는 것과 같습니다.
자기도 잘 모르는 교수는 어려운 수식을 써서 물리학을 가르칠 때 수학을 가르칩니다.
자기 자신도 잘 모르는 거지요.
그냥 수식의 순서대로 수식만 줄줄 풀어댑니다.
아니, 나는 물리학 배우러 왔지 수학 배우러 온 것 아닌데 말이지요.
남이 알아듣기 어렵게 복잡하게 가르치는 사람은 자기도 잘 몰라서 자신이 혼동된 가운데 있는 겁니다.
내가 생각하기에 뭔가 이상하면 남이 듣기에도 뭔가 이상한 것입니다.
혹시 제 말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네요.
)

다른 예를 들면, 히브리서를 이야기하며
배교, 이미 얻은 구원을 잃는 것을 말하는 것은
유치원에서 아이들에게
“1+1=2”를 가르치면서 동시에
제가 많이 써먹는 양자역학을 그것도 틀리게 가르치는 것과 같습니다.
논리적으로 이해 불가능한 대단한 비약인 것입니다.

제 의견으로는 히브리서에는
“배교, 이미 얻은 구원을 잃는 것”에 대한 교훈은 없습니다.
그것은 가정에 얽매어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3장중 10장에서 초지일관
“그리스도의 속죄의 제사“
즉 믿음의 기본인 사죄, 구원을 내내 강조하지 않습니까?
(그리스도의 속죄의 제사를 멸시하면 지옥행 그러니 예수님을 믿어라)
대상이 예수님을 안 믿거나 믿음이 아주 약한 사람들이라는 말입니다.
나머지 11 – 13장은 믿음의 견고함 유지와 성도의 생활 지침이구요

이걸 보고도 “배교, 구원을 잃어버린다“를 말하는 분은 성경의 문맥을 놓친 겁니다.
아니면 자기의 가정, Frame에 사로잡혀서 보지 못하거나.

그런 논리, 충분히 이해합니다.
이방인인 우리의 입장에서는 (저라고 하겠습니다)
예수님 믿고 나서도
악한 심정으로 교묘하게 죄를 범한다고 생각하는 것 자연스럽고
제가 저를 생각해보아도 그런 일이 저 자신과 주위에 많이 있습니다.
저도 양심에 찔리기도 합니다. (현실의 관찰입니다)

그래서 영원한 구원을 취소당한다는 개념이 들어오게 되는데
(비논리적 개념의 정립)
이것은 주님의 요한복음 10:28-29의 선언과 직접적으로 반대가 되는
모순이 생깁니다. (기존의 원리 및 개념과 모순 발생)
현실의 죄악된 모습과 이해의 불균형에서 오는 논리의 모순입니다.

편지를 쓴 사람과 직접적으로 읽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깜빡 잊은 때문에 오는 모순입니다.
이 모순을 제거하기 위해 또 다시 여러 가지로 무리한 시도를 하게 됩니다.

그런 오해라도 경건한 삶을 계속해서 이어 가는데 도움이 되면 참 좋겠습다 마는
개념의 불균형은 처음에는 그럴 듯하고 당장의 효과는 있을지 모르지만
장기적으로는 문제를 일으킵니다.
옳게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히브리서 안에서
신앙 원칙의 근본적 중요 요소(교리)인
주님께서 주신 구원, 영생의 약속과 정면으로 대치되는 개념(배교)이
전면에 크게 나오는 것을 비판하는 겁니다.
사람을 비난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곳에 있을지 모르는 배교의 개념을 말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한 가지 덧붙인다면
배교라는 개념은 오늘 하루를 믿음으로 사는
주님을 떠날 의사가 전혀 없는
신실한 하나님의 자녀와는
전혀 무관한 이야기이므로
크게 신경 쓸 것은 없다는 견해입니다.
성경에도 이것을 자세히 말한 곳을 찾기 어렵습니다.

다만 이해는,
“문맥을 따라 바르게 하자“는 취지로 쓴 글입니다.

11-13 장은 …
히브리인 성도에게나, 이방인 성도에게나
이야기가 무난하게 흘러 갑니다.


Leave a Comment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This site uses Akismet to reduce spam. Learn how your comment data is proces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