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유의 한계(Many faces of Truth)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이나 추상적 개념을 설명할 때에 비유를 쓴다.
그런데 특정 비유는 그 대상의 어느 한 면만을 설명하는 것만 가능하다.
그 한 비유로 그 대상의 모든 측면을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반드시 오류가 따른다.
비유로 설명하는 데는 반드시 제한이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런지 예수님의 천국에 관한 비유는 무척이나 많다.
천국은 하나일 터인데 비유는 참으로 많다.
비유가 몇 개인지 다 세어 보지 못했다.

그러나 우리는 한 가지 비유로 모든 측면을 다 설명하고 싶은 충동(유혹)을 느낀다
성경에도 비유가 아주 많고, 우리도 어떤 것, 개념들을 설명할 때 비유를 쓰는 데
그 때 마다 그 비유로 모든 면을 다 설명하고 싶은 충동(유혹)을 느낀다.
그 비유로 무리해서 모든 면을 설명하려는 시도를 한다.
그러나 이것은 오류이다.
거짓말 하나를 믿게 하기 위하여 다른 거짓말을 여러 개 만드는 것과 같다.

(
물리학에도 비유라면 비유가 있다.
물리학에서는 Model이라는 것(일종의 비유)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대상을 설명한다.
예를 들면 원자 모델 같은 것이다.
Dalton, Thomson, Rutherford, Bohr 그리고 양자역학적(현대) 모델… 등으로 많다
모델을 정확하게 발전시키면 시킬수록 정확하기는 해도 이해가 더 어려워진다.
정확한 모델은 더욱더 실체와 가까워지기 때문에 간략한 요점 설명이 어렵고 불가능해진다.
원자 모델을 더 이야기 하면 이야기가 다른 곳으로 빠지게 되니 이만 그친다.
)

(Dalton, Thomson, Rutherford, Bohr & Modern Models)

원래 이야기로 돌아가서…
하나님의 구원과 관련된 비유를 들어 본다.
나는 나의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임을 믿으며, 인정한다.
다음의 성경 말씀과 비유를 들어서 나의 구원을 설명한다.

(에베소서 2:1)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비유: 나는 영적으로는 죽은 시체였다)

(비유): 허물과 죄로 (영적으로) 죽은 시체인 나는…

“하나님, 저 좀 구원해주세요“라고 외칠 수도 없었고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하시려고 손을 내미셔도 그 손을 잡을 수도 없었으며
하나님의 구원이 필요하다고 느낄 수도 없었고
하나님이 없어도 잘 살수 있다고 생각했고
등등…
의 정말로 어쩔 수 없는 무기력한 존재였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로 나를 잡아 구원해 주셨다.
감사의 찬송이 절로 나온다.
“할 수 없는 죄인을 예수 홀로 속하네….“

그런데 이것은
주님을 믿고 성경 읽고 오랜 세월 지나며 점차 자라 난 깨달음이며 믿음이다

동시에 나는
요한복음 1:12,13 성경 말씀을 내 믿음으로 받아들여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예수님을 내 마음에 모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믿은 것이다.
내편에서의 하나님께 대한 반응이며 믿음이다.
이것은 내게 일어난 엄연한 불변의 사실이다.
내 산 믿음의 경험인 것이다.

그런데…
죽은 시체의 비유에서 발전한 아름다운 믿음/논리인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를 가지고

에베소서 2:8 을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그 은혜”가 하나님의 절대 주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신 것을 믿는다고 해서
“믿음으로 말미암아”를 그 믿음도 하나님께서 절대주권, 예정에 의해, 허락하여 주신 것이니
하나님께서 절대주권으로 주신 믿음으로 말미암아”라고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내용을
덧붙여 논리를 펴는 것은, 혹은 생각하는 것은 오류이며 성경의 변조이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구원을 얻었나니“로 성경을 변조하는 것이다.
믿음으로 말미암아를 싹 빼고 성경을 변조하는 것이다. (죄다)

“그 은혜”를 하나님의 주권으로 강조 했으면
“믿음으로”도 인간의 마땅한 반응으로 성경에 있는 대로 똑같이 강조하여 받아들여야 옳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믿으며 동시에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사람은
“믿음으로”에 다른 수식어를 붙여서는 아니 된다.
하나님께서 절대주권으로 주신 믿음으로 말미암아”라고 말 하려면
성경을 아주 많이 이곳저곳 수정/삭제해야 한다.

복음서 전체, 특히 요한복음에서 “믿으라”고 외치는 주님의 말씀 모두를
히브리서 11장에서 주장하는 믿음 전부를
그 외의 신구약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나를 찾고 또 찾고 간절히 찾고 믿으라고”하시는 말씀 전체를

“믿는 것도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야 그러니 인간의 역할은 아무 것도 없어”라고
큰 소리로 주장하는 것은 엄청난 무리이며 모순이다.
성경을 토막토막 내어 난도질 해야 한다.

논리적인 외눈박이이다. (강력한 그릇된 예정론의…)
하나님의 절대 주권만을 외눈으로만(일목요연하게) 보고 논리를 펴나가는 모순이다.
두 눈으로 다 보고 둘 다 인정해야 한다.
일견 서로 모순되는 것으로 보여도 성경에 있으면 둘 다 인정함이 옳다.
내 주장(교리, 믿음)과 다르게 보일 여지가 있다고 하여 나의 주장(믿음)에 맞게
성경의 다른 부분을 수정하려고 하는 죄의 유혹을 떨쳐 버려야 한다.
내 논리에 의하면 모순이라고 해서 기록된 성경을 재단, 재해석할 것이 아니라
나의 논리에서 한발 물러서서, 그 두 가지를 다 인정해야 한다는 말이다.
아니면 성경 말씀을 나의 원칙, 교리, 논리로 재단하는 오류(죄)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성경에 있는 개념을 (이 경우: 은혜 =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를
논리적(신학적)으로 정의를 내리고 (아주 섬세하고 복잡하게, 틀리면 안되니까)
그 정의를 가지고 하나님이 성경에서 하신 명령/선언 (이 경우: 믿음)을
거기에 맞추어 다시 정의하여 “믿음도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로 주신 것이다”라고
하는 것은 엄청난 순환논리의 모순이다.
나의 논리/주장/교리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고 있는 성경을 재단하는 것이다.
(Microsoft Excel을 사용한 분은 “순환참조 오류”를 경험해 봤을 것이다)

(
나의 경우 영적으로 죽은 시체라고 비유를 들었으니까.
이 비유에 문제가 있다면 논의가 달라지겠지만
)

그리고 그런 논리는 “믿어라!”라고 명령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에 항거하는 것이 된다.
(
다음의 논리의 전개를 생각해 보자.
1. 하나님의 절대 주권, 절대 예지
2. 하나님의 절대 예정
3. 따라서 믿음 =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로 주신 믿음
4. 따라서 하나님이 믿으라고 명령하신 믿음은 은혜 로 바뀌어야한다
5. 그 단어(믿음)는 빼라 라고 (무언 중) 주장한다.
6. “믿으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믿음“으로 무시/거역한다.
단계 단계를 넘어갈 때는 옳은 것 같으나
최종 결론은 하나님 말씀을 거역한다.
논리 전개의 오류(죄)이다.
)
하나님을 더 잘 믿고자 하는 논리의 전개(신학)가 하나님을 거역하는 논리가 되고 만다.
인간의 이성적인 논리의 한계이며 매우 조심해야할 사항인 것이다.
이성적 논리(삼단 논법)에만 집중하면 믿음을 떠난 결론에 도달하는 수가 있다.

또한 그렇게 이해해야만 우리 주님을 믿게 된다면 예수님 믿기 참 복잡할 것이다.
예수님을 잘 믿게 해야 할 논리(신학)가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조직적/논리적으로 방해하는 사탄의 도구로 전락한다.

이것이 나는 전적으로 무능한 타락한 시체와 같은 존재이므로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혜가 필요하다는 비유에서 출발하여
믿음이라는 개념에 까지 논리를 확대 전개한 모순되는 결과이다.
오류다.

이러한 논리의 전개는 마치…
“원숭이 xxx는 빨개 – 빨가면 사과 – 사과는 맛있어…” 이렇게 진행하여
“백두산 뻗어내려 반도 삼천리“로 끝나는 아이들 노래와 같아진다.
(이 노래 모르는 분 많을 것 같은데…)
원숭이 xxx가 백두산으로 바뀌는 넌센스인 것이다.
이런 오류를 우리가 사변적 논리 전개에서 범하는 것은 아닌지…?

하나님의 전지, 전능, 예정 그리고 절대 주권적인 은혜 모두 믿어 타당하다.
아름답다.
그러나 그것으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크게 여러 번 강조하는
“믿음”과 같은 기본 개념에까지 확대하여
“하나님께서 절대 주권으로 허락하신 믿음”이라고 변조 주장하는 것은
“원숭이 xxx = 백두산“으로 만드는 것과 유사한 치졸한 논리의 오류이며
인간의 하나님을 향한 오만이다. 개념적인 죄악인 것이다.
두 가지 다 겸허하게 믿음으로 받음이 옳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극단적 주장은 늘 논리의 오류를 초래하며 그것을 실행에 옮길 때에 매우 위험하다.
그러니까 칼빈주의자들이 알미니안주의자들을 집단 살해했을 것이다.
믿음의 이름으로…

과학에서는 이론을 발전시키려면 단계 마다 가정이 들어가고
단계별 가정이 맞는지 되돌아가서 검증한다.
그리고 최종 결론을 처음 가정과 같이 검증하여 맞는지 틀리는지 여부를 또 검증한다.

우리 신앙 논리도 단계마다 믿음의 근거인 성경으로 돌아가서
성경 다른 곳에서는 어떻게 선언하고 있는지 확인해 봐야 하는 것이다.
신학자 누구, 유명 설교자 누구의 주장 이런 것이 주된 reference가 되어서는 안 된다.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
하나남의 말씀이며 믿음의 근거라고 입으로 말하면서 논리의 근거는 다른 곳,
인간의 주장에서 찾음은 모순이다.

성경 말씀에 순종하고자 하는 사람은 이런 순환논리의 오류에서 벗어날 것이다.

내 주장은…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는 은혜로 받아들이고
“믿으라”는 명령은 순종해야할 하나님의 명령으로 순종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주권적이고 절대적인 은혜(선택)”과
“나의 자발적이고 의지적인 믿음” 당연히 서로 충돌하는 두 명제를
하나로 다른 하나를 덮어씌우는(override) 시도를 할 것이 아니라
둘 다 성경에 선언하고 있으므로
둘 다 순종하는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
내가 성경을 읽은 기억으로는
“믿음”이란 단어를“예정”이라는 단어보다
성경에서는 훨씬 더 많이 본 것으로 기억한다.
“절대 주권”,“은혜”이런 단어 까지 확대하여
“예정“이라는 개념에 포함시키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한다.
)

즉 내가 예를 든“죽은 시체“의 비유는
인간인 나의 전적으로 무력함,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에 의한 구원을 설명하는 데 까지만 유용하다.

비유, 실예는 원리나, 본질을 알기 쉽게 설명하기 위한 수단이지
결코 비유에서 원리나 본질이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본말을 혼동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그런 예로부터
“하나님의 절대 예정의 은혜”라는 개념을 확장하여 다른 곳에까지 덮어씌우는 것은
논리의 오류이며 결과적으로 믿음에서 출발하여 불신, 성경 말씀에 대한 거역으로 끝난다는 말이다.
이것이 얼마나 웃기는 역설(Paradox)인가?
인간의 이성적 논리에는 Paradox가 도처에 도사리고 있다.
논리의 전개는 단계 마다 성경의 문맥과 일치하는지 확인해야 한다.
하나님 말씀의 권위에 순복해야 한다.

하나님의 진리에는 여러 가지 측면(Many faces of Truth)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진리는 하나님께서 성경에 선언하신 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라.
억지로 섞어서 하나로 통일하려는 인간적 노력을 하지 말라.
그러니까
성경을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열심히 읽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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