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송이 국화꽃을

국화 옆에서: 미당 서정주님의 명시


통계(경험적 인과론): 과학인가 미신인가?

국화 옆에서서정주 시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

먼저 밝힐 것은
저는 서정주 시인의 시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고
재미로 이것을 인용했음을 밝힙니다.
(혹, 이러면 재미없는 내 글을 읽으실까 해서)

두개의 서로 관련이 없어 보이는 사건이
(통계적으로 서로 독립적인 사건이라 한다)
여러 번 비슷하게 발생한 것을 보면 (관측하면)
우리는 두 사건이 통계적 상관관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시인이 관찰하기에…
소쩍새가 울었다. … 국화꽃이 피었다.
천둥이 울었다. … 국화꽃이 피었다.
그래서 서로 긴밀한 상관관계가 있다고 본 것이다.
“국화꽃을 피우기 위하여 소쩍새가 울었나 보다(울었다)라고”
관찰 결과를 결론 내린 것이다.

이것이 통계학적으로 맞는가?
두 개의 사건이 서로 상관관계가 있으려면…
(관찰 1) 소쩍새 1 번 울었다 … 국화꽃 1 송이 피었다.
(관찰 2) 소쩍새 2 번 울었다 … 국화꽃 2 송이 피었다.
(관찰 3) 소쩍새 6 번 울었다 … 국화꽃 6 송이 피었다.

그러면 양(+)의 상관관계가 있다고 정의 한다.

그런데
(관찰 1) 소쩍새 1 번 울었다 … 국화꽃 두 송이 피었다.
(관찰 2) 소쩍새 2 번 울었다 … 국화꽃 한 송이 피었다.
(관찰 3) 소쩍새 6 번 울었다 … 국화꽃 두 송이 피었다.
거나
(관찰 4) 소쩍새 0 번 울었다 … 국화꽃 무려 100 송이 피었다.
거나
(관찰 5) 소쩍새 제멋대로 울었다 … 국화꽃 제멋대로 피었다.
라면 상관관계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통계에서는 관찰의 횟수가 많아야 한다
(
쉽게 열 손가락 수, 10회 이상
그러니까 국화꽃을 관찰하려면
10 년은 관찰해야한다는 것이다.
소쩍새 우는 횟수도 세면서…
상관계수: 상관관계를 나타내는 수식은 머리 아프니 생략합니다.
)

우리는 경험(관측)상 이 둘 사이에는 상관관계가 없음을 잘 알고 있다.

따라서 통계적으로는 시 “국화 옆에서”는 오류다.

(
아니?
명시 “국화 옆에서”를 가지고
이런 무엄하고도 골 아픈 말을 하다니
서정주 시인께 정말 죄송합니다.

모든 것을 이렇게 생각하면 세상이 얼마나 재미가 없을까?
시는 시로서 아름답게 받아들임이 옳은 자세다.
나처럼 생각하면 세상살이가 참 재미없을 것이다.

나는 뭐,
골치 아픈 내 글을,
사람들이 당연히 읽지 않을 것,
각오 하고 글을 씁니다.
나, 이상한 사람 맞지요?
)

어쨌든 이런 방식을 통계적으로는 상관관계라고 한다.
그리고 이것은 통계적(경험적)으로 인과관계 이론(인과론)의 기초가 된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생활에서 소쩍새와 국화꽃처럼
무관한 두 사실을 인과관계로 연관 짓는 일을 자주한다.
(오류다, 어떻게든지, 원하는 것을 정당화하고 싶어서)

통계적 인과론 즉,
경험적 인과론은 과학인가 미신인가?

사용 방법에 따라 과학도 되고 미신도 된다.

예를 들면…
별자리와 운명
사주와 운명(팔자)
점치기, 카드점, 화투점
이런 것들은 우리는 미신이라고 한다.

일기 예측,
수요 예측,
지진 발생 예측,
금년에 유행할 인푸루엔자 예측
이런 것들은 여러 해 관측,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예측한다.
이런 것들은 우리는 통계학적 예측이라고 한다.

미신적 점치기, 통계적 예측 방법은
모두 다 확정적으로 알 수 있는 사실을 이용해
불확정적인 미래를 미리 알고자(예측)하는 것이다.

성경에 예언이 있으니 성경을 보고 나의 미래를 예측하려는 시도를 할지도 모르겠다.
(성경을 점치는 책으로 오용, 남용한 미신이다)

어떤 것이 터무니없는 미신이고
어떤 것이 과학적인 방법일까?

미당 시인의 명시 “국화 옆에서”가 골치 아픈 통계, 미신 이야기로 연상 전개되었다.
우숩게도 내가 말한 “연상 논리의 오류”를 나 자신이 범하고 있다.


다음의 예를 보자.

(역대상 4:10)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가로되 원컨대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 하사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

이것을 내게 적용하여 하나님께 복을 구하는 것은
(이렇게 눈에 확 뜨이는 좋은 예가 딱 한번 뿐이지만 성경에 있으니까)
소쩍새를 국화꽃에 적용하는 것과 같은 오류이다.
(내글 “야베스의 기도”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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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서 하나님의 축복의 선행 조건이 되는 것들은 많은 곳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내 글 “들어와도 복 나가도 복”)


여기 “야베스의 기도”에서는 하나님 축복의 선행 조건이 되는 것이 “기도”외에는 없다.

그래서 “기도 – 하나님의 축복“ 을 통계적(?)으로 긴밀한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고
(물질의 복을 너무 너무 받고 싶으니까)
“저도요, 저도요. 하나님 복주세요” 라고 기도하고 싶고 기도하라고 가르치기도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기도하는 것은 좋다.
그러나 이것은 미신과 다름이 없는 통계적인 오류인 것이다.
건전한 믿음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는 읽어 보지도 않았지만 “야베스의 기도” 이런 책은
제목부터가 건전한 믿음에 결코 도움이 안된다고 생각한다.
(
저는 책도 읽지 않으면서
그런 비판을 마구하다니
내가 너무 심했나?

통계 이야기 하다가 말이 너무 길어저서
다른 예는 다음 기회에
생각나는 대로 쓰고 싶다.

내가 생각해도 나는 좀 복잡한 사람이다.
내가 억지를 쓴다고 생각하는 분은
의견 환영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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