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셉은 언제 하나님의 섭리를…?


요셉은 언제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했을까?

하나님께서 …
가족보다 자기를 애굽 땅에 먼저 보내셔서 온 가족을 구원하신다는 것을…
(창세기 45:5)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아주 어려서부터?
꿈을 꿀 때부터?
구덩이에 던져지고 노예로 팔려갈 때?
노예시절?
감옥시절?
애굽 총리가 되고 나서?
형들을 다시 만났을 때?

성경에는 그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없다.
다만 짐작하여 유추할 뿐이다.

아마도 그 시작은 (내 생각에)
형들에 의해 구덩이에 던져지고
노예로 팔려간 때, 어느 때쯤이었을 것이다.

구덩이 속에서 형들에게 오랜 시간 동안 간절히 애원했을 것이다.
요셉에게는 너무도 고통스럽고 긴 시간이었을 것이다.
형들도 그것을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않았다” 라고
(창세기 42:21-22)
21. 그들이 서로 말하되 우리가 아우의 일로 인하여 범죄하였도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
22. 르우벤이 그들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너희더러 그 아이에게 득죄하지 말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래도 너희가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의 피 값을 내게 되었도다 하니

그 때 요셉은
형들의 잘못을 아버지 야곱에게 일러바친 이야기도 들었을 것이다.
형들에게 잘못했노라고 빌고 애원도 했을 것이다.
꿈 이야기를 해서 미움을 더 샀다는 것도 알았을 것이다.
형들이 느꼈던 아버지의 편애에 대한 불만과 소외감도 깨달았을 것이다.

아마도 어린(17세 이전) 요셉은 생각이 그리 깊지는 않았던 것 같다.
형들의 과실을 아버지에게 일러바쳤고.
멋진 꿈을 꾸면 자랑스럽게 형들과 아버지에게 말했다.
(
17세 이전의 소년으로서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나이 70을 넘긴 내가 이 나이에 유치한 언행을 하는 것을 보면.
)

(창세기 37:2, 5-7)
2. 야곱의 약전이 이러하니라 요셉이 십 칠세의 소년으로서 그 형제와 함께 양을 칠 때에
그 아비의 첩 빌하와 실바의 아들들로 더불어 함께 하였더니 그가 그들의 과실을 아비에게 고하더라
5. 요셉이 꿈을 꾸고 자기 형들에게 고하매 그들이 그를 더욱 미워 하였더라
6.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청컨대 나의 꾼 꿈을 들으시오
7. 우리가 밭에서 곡식을 묶더니 내 단은 일어서고 당신들의 단은 내 단을 둘러서서 절하더이다

(구덩이에 빠트려진 요셉)

그런데,
요셉의 대단한 점은 죽음을 눈앞에 둔 절망의 순간,
앞으로 더 살 수 있을지 죽을지 모르는 그 순간을
인생의 중요한 교훈의 시점으로 승화시켰다는 것이다.
(
내 생각이다.
성경에는 그에 대한 말이 없다.

내가 여기서 살아난다면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으로 살겠다고
자기만 의로워서 남의 잘못을 지적, 정죄하는 사람보다는
사람의 입장과 마음을 이해하는 사람으로 살겠다고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기도했을지 모른다.
)

창세기 39:2 이하를 보면
아마도 형들에 의해 구덩이에 던져지고
노예로 팔려갈 때였을 것이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사람이 되었고,
하나님의 뜻을 깊이 생각하고 즉시 순종하는
믿음의 사람, 순종의 사람이 되었다는 뜻일 것이다.
(하나님을 거부하는 사람에게 어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수 있겠는가?)

(창세기 39:2,3)
2.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3. 그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심을 보았더라

그리고 아마도 많은 세월이 흐른 후에
그 모든 사건들을 돌아보며
하나님의 섭리로 믿고 이해했을 것이라는 점이다

예전부터 좋아했던, 힘들 때마다 기억했던 성경말씀을 생각한다.
(전도서 7:14)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하나님이 이 두 가지를 병행하게 하사
사람으로 그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
나에게 스스로 말한다.
인생의 매 순간은 하나님께서 나를 교훈하시는 때다
그 교훈을 즉시 깨달으면 좋지만
– 보통은 아니다 –
억지로 급히 깨달으려 조급해 하지 말고
주님께서 “바로 이거다”라고
손에 쥐어 주시며 깨우쳐 주지 않는다고
원망하지 말고
번뇌하지 말고
억지로라도 믿음으로 기다리라.
)

아마도 그때, 요셉은 깊이 생각했을 것이다.
말 할 때와 하지 말고 참아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

그래서 그런지 보디발의 아내에게 강간범으로 모함 당했을 때
아무런 변명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만약 요셉이 젊은 충동으로 유혹에 넘어가 보디발의 아내와 불륜을 범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성경에 없는 이야기지만 한번 상상해 본다.
보디발의 아내와 불륜의 공동 운명체가 되는데 요셉이 매우 불리한 입장이 될 것이다.
거절 못하고 계속 불륜을 해야 하고.
숨겨진 불륜의 상대 남자가 되어 계속 주인 보디발을 속여야하고.
보디발의 아내는 언젠가 요셉을 버릴 가능성이 매우 크고.
아마도 거의 확실하게 중도에 탄로가 나서 처형될 운명이었다.
보디발의 아내는 자기가 살기위해 모든 죄를 요셉에게 덮어쓰게 할 것이다.

그러니 비록 목숨이 위협을 받아도 옳은 선택, 처신이 우선이다.
사탄은 죽음을 가지고 우리를 위협한다.
예수님은 거기에서 우리를 구원하시었다.

(히브리서 2:14,15)
14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15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

요셉은 그런 것을 이리 저리 따져서 생각하지 않고
먼저 하나님께 죄를 짓지 말아야 된다고 그녀의 제안을 즉시 거부했다.
이치를 따져 이해하기 전에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는 것이 우선이다.

(창세기 39:9 하)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

먼저 순종하면 다음에 이해하게 된다.
주님은 요한복음에서 그것을 말씀하신다.
나의 계명을 하나 가지면 키키라.
그것이 나를 사랑하는 증거이다.
그러면 너는 나의 인도함을
더 많이 깨닫고 이해하게 될 것이다.

(요한복음 14:21)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
왜? 젊은 시절에…
나는 이해를 먼저 하고
다음에 순종하려 했을까?
주님께 대한 신뢰,
믿음이 없었던 때문이 아닌가?
내가 스스로 현명하다고 오만해서가 아닌가?
)

요셉이 집무하러 들어간 그때,
어떻게 그때 집에는 아무도 없었을까?
아마도 요셉을 유혹하기 위한 그녀의 잘 짜여진 각본이었을 것이다.
명령에 따라 집을 비운 집안의 하인들은 모두다 짐작을 했을 것이다.

(창세기 39:11)
그러할 때에 요셉이 시무하러 그 집에 들어갔더니 그 집 사람은 하나도 거기 없었더라

그래서
우리가 아는 대로 요셉은 누명을 쓰게 된다.

(창세기 39:17-20)
17. 이 말로 그에게 고하여 가로되 당신이 우리에게 데려온 히브리 종이 나를 희롱코자 내게로 들어 왔기로
18. 내가 소리질러 불렀더니 그가 그 옷을 내게 버려두고 도망하여 나갔나이다
19. 주인이 그 아내가 자기에게 고하기를 당신의 종이 내게 이같이 행하였다 하는 말을 듣고 심히 노한지라
20. 이에 요셉의 주인이 그를 잡아 옥에 넣으니 그 옥은 왕의 죄수를 가두는 곳이었더라 요셉이 옥에 갇혔으나

대략 20-23세 정도의 청년이었을 텐데.
너무나 황당하고 참 억울했을 터인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누명을 썼다.

(
여기에서 흥미로운 점은 보디발의 아내가 한는 말
“당신이 우리에게 데려온 히브리 종이”(창세기 39:17)
다시 말하면 죄는 자기가 지은 것이 아니고
당신(보디발)과 요셉(히브리 종)이 죄를 짓게한 원인이라는 것이다.
자기는 쏙 빠지고 보디발과 요셉에게 죄의 원인과 책임을 떠 넘긴다.
이것은 아담이 하나님께 한 말과 같다.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하게 하신 여자 그가 ”(창세기 3:12)
사람은 어떻게 그렇게 똑 같을까?
옛날이나 지금이나.
이런 걸 맞불 작전이라고 하던데…
이 세상에서 권모술수릏 쓰는 사람들이 쓰는 방법이다.
)

그런데 보디발은 왜 요셉을 죽이지 않고 감옥에 넣었을까?
노예는 주인의 재산이어서 죽여도 아무 문제가 없었을 터인데?
(성경에는 그에 대한 기록이 없다)

만약, 요셉이 진실을 밝히고 결백을 주장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두 가지 시나리오를 예상할 수 있다.

보디발이 자기 아내를.
(1) 정숙한 여자로 믿은 경우.
(2) 음탕한 여자임을 알았었지만 체면상 모른척한 경우.

(1)의 경우, 정숙한 부인을 강간 시도 및 누명을 씌운 악질 강간 미수범이 된다.
당연히 즉시 처형이다.
(2)의 경우, 평소 아내의 부정함이 알려질까 체면이 손상될까 염려했는데
요셉의 무죄를 인정 하면 아내의 부정을 공개적으로 인정하는 것이 되니
자기의 사회적 체면, 명예를 위해서라도 요셉을 처형해야 한다.
어느 경우나 요셉은 죽게 되어있었다.

그런데 요셉은 변명하지 않았고, 보디발은 요셉을 죽이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성경은 보디발이 요셉을 매우 신뢰했음을 직 간접적으로 말한다.

아마도 보디발은 요셉이 결백할 것이라고 마음에 짐작했기 때문에
그런데도 요셉이 아무 변명도 없이 죄를 뒤집어쓰는 것을 보고
속으로는 고맙게 생각을 하고 있지만 전혀 내색을 하지 않고
자기의 체면도 유지하고 요셉도 죽이지 않기 위해
일부러 크게 화를 내고 처형하지도 않고 감옥에 넣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성경은 그것을 밝히지 않는다. 나의 짐작이다)

그래서 요셉은 말(진실)을 할 때와 꾸욱 참을 때를 분별하여
이번에는 죽음의 위기를 면했다.
살아야 장래가 있는 것이다.

(베드로전서 2:19-21)을 생각한다
19.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20.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21.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
나는 왜 내 인생의 지나간 어느 시점에서 내가 처한 의로운 진실을
내가 억울하고 분하다고 해서 꼭 말을 해야만 했을까?
상대의 입장도 생각하면서 참는 것이 좋지 않았을까?
나의 의로움이 상대를 죄인으로 정죄하여 몰아가는 것이
반드시 옳고 아름다운 일인가?
덕스러운 일인가?
그러면 그 반대로 덕스럽다고, 좋은 게 좋다고 불의를 눈 감아야 하는가?
내 생각은 이렇다.
나만 억울하게 해를 당하면 할 수 있다면 참는 것이 좋다.
다른 가까운 사람(동료, 가족)이 억울한 해를 입으면 불의에 맞서는 것이 옳다.
우리의 감정은 그 반대로 행동을 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 것을 나이 많이 먹어 늙은 지금 깨닫는 것일까?
젊어서 사회적으로 활동이 더 많았을 대 깨달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마도 나의 인격이 그 정도 밖에 되지 않는 부족한 사람이어서 그랬겠지.

성경 말씀에 먼저 순복하는 것이
이해하는 것 보다 우선이라는 것을 왜 이제 깨닫는 것일까?
앞으로 그런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을까?
)

보디발의 감옥에 들어가는 그 때가
나올 기약이 없는 감옥에 들어가는 그 때가
요셉이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하심을 이스라엘 민족에게
펼치는 인물이 되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고 생각한다.

이제 요셉은
애굽의, 말하자면 정치범(고위 귀족)들이 머무는 감옥에서
애굽의 정치, 경제, 문화 등등을 배우며 때를 기다리면 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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