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례요한은 자기가 예수님 보다 사람 앞에 더 중요하게 나타나는 것을 거부했다.
자기의 소임은 사람들을 예수님께 인도하는 것이며
사람들이 예수님을 직접 보고 그 말씀을 듣도록 인도하는 것임을 잘 알았다.
세례요한은 선언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요한복음 3:28-30)
28 나의 말한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거할 자는 너희니라
29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
30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이것이 오늘 우리들에게는 어떻게 이해되고 적용될 것인가?
예수님은 지금 우리 눈에 물리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 내가, 어느 특정 개인(종교 지도자)이
예수님 보다 사람 앞에 나설 수 있지 않을까?
나는 다른 그 무엇이
예수 그리스도 앞에
다른 말로 하면 성경 말씀 앞에
예수님 그리스도의 말씀 앞에 서는 것을 반대 한다.
나 자신을 포함하여
어떤 거룩한, 경건한, 신앙적인 그 무엇은
다른 사람을 예수 그리스도,
생명의 양식인 성경 말씀으로 인도하여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
그 말씀을 듣게 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우리는 어느 분을 매우 존경하거나
우리가 속해 있는 집단(교파)에 자부심이 강하거나 등등의 이유로
나도 모르는 중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있는
성경 말씀보다
그 다른 무엇을 우선하는 경우가 많다고 본다.
그러면서 우리는 그것이 성경적이라고 주장한다.
나는 이것을 거부하며 반대한다.
교부 누구의 말이 …
칼빈의 이론이 …
천주교의 교리가 …
청교도의 믿음이 …
장로교의 교리가 …
감리교의 교리가 …
신학자 누구의 말이 …
철학자 누구의 말이 …
목사 누구의 말이 …
성경 말씀, 예수님의 말씀보다 앞서는 것을 반대 한다.
나는 사람들, 교우들이 그렇게 말하는 것을 많이 들었다.
설교시간에도 그런 식의 말을 많이 들었다.
물론 그 분들이, 혹은 특정 교파의 교리를 정립한 분들이
나보다 훨씬 더
경건하며, 거룩하며, 현명하며, 지혜로우며,
영성의 훈련을 더욱 잘하였으며,
역사적으로 증명이 되었으며
등등 …
하더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직접 서야 하는 것이다.
구원을 받는 믿음이 하나님 앞에 내가 홀로 서야 하는 것처럼.
따라서 다른 사람의 믿음을 인도하는 사람은
그 사람이 성경 말씀 앞에 서도록 돕고 자신은 뒤로 물러나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 성경 말씀보다 자기의 권위를 더 앞세우는 자가
사이비 교주, 적그리스도가 된다.
자신을 주님의 종으로 자처하는 사람은
스스로도 자신을 돌아보고 경계할 뿐 아니라
그런 말을 남에게서 듣던 아니 듣던
이것을 경계해야한다.
“성도들이 나를 주님처럼 스스로 공경하는 걸 어떻게 하나?“
이것은 자기를 기만하는 변명이다.
사도 바나바와 바울이 루스드라에서 자신의 옷을 찢은 것을
존경받는다고 생각하는 주의 종은 기억해야 할 것이다.
오늘날도 존경의 표시는 그 때 그들이 화환과 소를 가지고 왔던 것처럼
물질(돈)으로 나타난다. 경계해야 한다.
(사도행전 14:14)
두 사도 바나바와 바울이 듣고 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 뛰어 들어가서 소리질러
세례요한의 고백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유효하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사람의 믿음을 인도하는 사람은,
믿음의 지도자는,
주님의 종은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도록 돕고 자신은 뒤로 물러나야 한다.
성도들은 경건한 주님의 종을 변질시키지 말도록 주의해야 한다.
특별히 가까이서 교직자를 돕는 사람(장로 등등)이 그래야 한다.
그러려면 성도들은 성경 말씀을 열심히 잘 읽어야 된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베뢰아 성도들의 태도는 오늘 날도 매우 중요하다.
(사도행전 17:11)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성도의 믿음을 인도하는 분이 자기의 역할을 줄여 가며
성도를 하나님께 가까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도 할 때에
성도는 자신이 힘을 써서 하나님의 말씀에 가까이하여 양과 질을 늘여야 한다.
성경을 열심히 읽어야 한다.
우리가 …
주님께서 성경에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누구는 이렇게 이해했고
나는 그 것을 받아들인다 는 자세는 좋다
그러나 누구의 말이니 이게 옳고
어느 교파의 교리이니 그게 틀리고
하는 식의 주장을 배격한다
성경에 있는 주님의 말씀은 이런데
나는, 우리는 이렇게 이해하고 순종한다
이런 자세가 옳다
성경을 열심히 읽어야 한다.
(고린도후서 10:4,5)
4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
5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내가 말하는 이 주장을 포함하여 우리의 올바른 논리가 성경 말씀보다 우위에 서는 것을 반대한다.
주님께서 성경에 이렇게 말씀하신 것을 나는 이렇게 이해하고 순복한다 라는 자세가 옳다.
세례요한이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라고 한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포함한 그 누구의 이론 보다 우선해야한다고 믿는다.
(시편 138:2하)
주께서 주의 말씀을 주의 모든 이름위에 높게 하셨음이라
(에베소서 1:21)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빌립보서 2: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모든 이름위에 높게 하셨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이름위에 뛰어난 것과 동일한 표현이다.
당연한 것은 예수님은 살아계신 하나남의 말씀으로 이 세상에 오셨고
주님의 말씀(성경)은 하나님을 나타내는 가장 우선적인 수단이기 때문이다.
부끄러운 말이지만 나는 신앙서적을 포함한 책을 거의 읽지 않는다.
언젠가는 나도 신앙 서적을 읽을 것이다.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의 책도 읽어야 하겠지만
그 보다는 성경을 많이 읽는 것이 더 긴급하다고 생각하여 성경만 읽는다.
다행히 우리 목사님께서 대신 읽어서 설교시간에 핵심을 알려 주신다.
지금은 어려서 부터 대학 시절까지 공부하고 읽은 책만으로도 충분하다.
교만한 말이지만 나는 내가 지식이나 교양이 딸려서 창피하다고 생각한 적이 별로없다.
나는 성경의 주장 앞에 나의 말을 포함하여 인간의 주장이 앞서는 것을 반대한다.
특정 교부, 학자, 교단, 목사의 주장이 성경을 대치하는 것을 반대한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는
동일하게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한다.
*** 사족이지만 예를 하나 들겠다 ***
장로교 예정론의 영향을 받은 분들은
예정론을 개개인의 행동, 믿음에 까지 강력하게 주장하는 것을 봤다.
나는 성경외의 책을 거의 읽지 않았기 때문에
칼빈이 정말로 그렇게 주장했는지는 모르겠다.
나의 상식으로는 그렇게 주장했다고는 결코 생각할 수가 없다.
그가 경건하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 진실한 사람이라면 말이다.
“예정“이라는 말은 직접적으로 성경에서 교회와 관련하여 에베소서에서만 딱 4번 나온다.
그 중 다음 2번은 개인을 의미한다고 볼 수도 있고.
(에베소서 1: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에베소서 1:11)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다음의 2번은 명백히 개인이 아닌 교회를 집합적으로 말하고 있다.
(에베소서 1:9)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에베소서 3:11)
곧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
사람 개개인을 염두에 두고 “예정”이란 말을 직접 사용한 경우는
성경 전체를 통하여 딱 2번이라는 말이다.
반면에 “믿음“이라는 말은 구약을 빼고 신약에서 만 그것도 명사로만 200번 이상 나온다.
구약에서는 헤아리기 힘들게 많이 나온다.
히브리서 11장은 거의 매 구절이 믿음을 언급한다.
믿음, 믿음의 선택, 믿음의 행동이라는 의미로 나온다.
따라서 개인의 삶과 믿음에 까지 예정론을 펴는 것은
사람이 논리적으로 주장하는 “예정론”을
하나님이 성경에 누누이 강조하여 말씀하신 “믿음” 보다
앞에 내세우는 것이므로 나는 이를 지지하지 않는다.
“믿음”과 “예정”은 둘 다 성경에 있으므로
둘 다 인정하는 것은 옳은 태도이다 그러나
믿음에 더욱 큰 비중을 두는 것이 타당하다.
(성경에 언급한 횟수가 훨씬 많기 때문이다.)
그래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라는 세례 요한과 같은 아름다운 태도가 되는 것이다.
나는 칼빈이 정확하게 무엇이라 했는지 모르며 그것을 공부할 여력이 없다.
그러나 사람들이 보통 말하는 내가 지적한 “예정”이라는 의미가 오해라면
장로교 계통의 신학자나 목사는 성도들에게 올바른 것을 가르쳐야 할 것이다.
(다음의 내 글에서 이 주제를 간간히 다루었다)
(1) 성경이 반복해서 말하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