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체의 연습 (묵상)

(디모데전서 4:8)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라고 성경에 기록 되어있는데
그 육체의 연습이 나의 성경 읽기에 막대한 영향을 준다는 것을 알았다.
(제 자랑이라고 오해가 없기 바랍니다)

하루에 6시간 정도를 책상에 앉아 성경을 읽는데
(이것은 경건의 연습에 해당되려나?)

그렇게 3개월을 하니 허리가 아파서 제대로 걷기도 힘이 들었다.
매일 같이 걸어서 이것을 원상으로 되돌리는 데 2개월 정도가 걸렸다.
다시 6시간 정도를 앉아서 성경을 읽으려니
이번에는 다리가 저리고 엉덩이가 아파서 계속 앉아서 읽을 수가 없었다.

걷기, 계단 오르기, 스쿼트 등을 해서 허벅지와 엉덩이의 근육을
탄력 있게 강화를 해 놓아야만 책상에 계속 앉아 책을 읽을 수 있었다.
운동을 1 주일 정도 쉬면 나이가 나이인지라 근육이 빠져서 다시 다리가 저렸다.

경건하게 성경을 읽기 위해서는 육체의 단련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육체의 연습은 매우 많은 유익이 있으며 범사에 유익하다는 말인 것이다.

그러면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라고 한 성경의 말씀이 틀린 것이냐?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디모데전서를 쓴 2000년 전 쯤에는
사람이 이동을 하려면 언제나 자기의 두발로 걷거나 뛰어나 해야만 했을 것이다.
기본적으로 걷는 양, 운동량이 많았을 것이다.
그러니 육체의 연습을 한다는 것은 꼭 필요한 이상의 단련을 한다는 뜻이니
마치 운동선수와 같은 강도 높은 훈련 혹은 노동을 한다는 말과 같을 것이다.
그러니 약간의 유익 만 있을 수밖에…
(
이런 것을 간단하기는 하지만
역사적 문화적인 성경의 이해라고 할 수 있다.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라고 한 이 구절은 틀린 것이 아니다.
역사적, 사회적인 상황이 그때와 바뀐 것뿐이다.
단순하게 “이 성경 구절 틀렸다” 라고 말하면 할 말 없다.
)

60 여년전 고등학교 시절 차비 아끼려고 마포 전차 종점에서 서강까지 걸어 다닌 적 참 많다.
등교시간에 혜화동 버스 정류장에서 언덕 위 보성 고등학교 까지 뛰어가던 그 길은 왜 그리 멀고 힘들든지
그래도 경신고등학교는 더 높이 있어서 내가 보성고등학교 다니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던 시절이 있었다.
먹는 것은 부실해도 하체의 운동량을 많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 현대 문명국에 사는 나는 다르다.
걷는 거리가 거의 없다.
어디나 차를 몰고 다닌다.
운동량이 절대적으로 적으니 먹으면 근육은 생기지 않고 살만 찐다.
이것이 악순환이 된다.

그러니 체육관에서 운동을 열심히 해서 근육을 강화해 놓아야 한다.
그래도 2000전에 디모데가 운동을 따로 하지 않았던 것 보다 운동량이 적을 것이다.
그러니 육체의 연습이 현대는 많은 유익이 있는 것이고 경건한 생활에도 매우 중요하다.

이래서 아마도 우리는
성경을 내 생활에서 실천하기 위하여 진지하게 묵상해야 하는 것이다.
성경 기록한 시대로부터 2000년이 떨어져 있는 내가
성경의 원래의 의도를 파악하고 내 삶에 실천하려면 어떻게 이해해나?
진지하게 생각해야 한다.

실천하려는 진지한 노력을 해 보면 묵상하게 된다.
실천, 순종하려는 노력 없이 생각만 펼쳐 가면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다.

하루 6시간이상 책상에 3개월 이상 앉아서 성경을 읽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내가 이 말(디모데전서 4:8)을 이와 같이 이해할 수 있었을까?

(여호수아 1:8)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여
기록한대로 다 지켜 행하라고 명령하셨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하신 명령이며
오늘을 사는 내게 하시는 명령이라고 믿는다.

성경에 기록한 뜻을 따라 순종 실천하려면 묵상해야한다.
깨달음을 얻고자 묵상하면 깨우침 보다 비 실천적인 억지 논리를 만들어 내기 쉽다.
물론 지식적인 이해(깨달음)만 있는 경우도 많지만
기본적으로 성경의 묵상은 순종, 실천이 우선적 목표라고 본다.
(
단,
아무리해도 이해가 안 되는데 실천하려 하면 억지가 따른다.
올바른 이해도 중요하다.
인간의 생각과 행동은 균형이 중요.
그래서 중용이라는 말이 나왔는지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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