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이 구절을 읽었을 때
수고하고 무거운 나의 짐을 내려놓고
주님의 거룩한 멍에를 어깨에 메고 주님께 배우는 것으로 생각했다.
“귀하고 거룩하고 중요한 주님의 사명을 어깨에 메고 모든 것을 희생하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십자가 밑에 나아가 내 짐을 풀었네”찬송했는데…
옛 짐은 십자가 밑에 내려놓고 커다란 새 짐을 진다면 그게 뭔가?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라고 말씀하셨지만
그것이 무슨 쉼이 되겠는가?
우수운 일이 아닌가?
성경을 다시 읽어보면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 말씀이다.
“나의 짐을 지고”가 아니고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이다.
멍에는 소(말)가 수레를 쉽게 끌기 위한 도구이다.
물론 수레 위에는 짐을 싣는다.
이렇게 짐을 지고 가면 좀 쉽기는 하지만 무거운 짐을 지기는 마찬가지다.
다시 생각해 본다. 주님이 말씀하신
“나의 멍에”는 주님이 내 어깨 덥석 얹어주시는 멍에가 아니라
주님이 지고 계신 주님의 멍에인 것이다.
두 마리 소가 한 멍에를 지고 짐을 끌고 갈 때 하나가 힘이 세서 짐을 다 끌고 가면 다른 한 마리는 그냥 따라만 가면 된다.
그게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의 의미인 것이다.
주님의 멍에를 함께 메고 짐을 끌고 가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다.
그래야 마음이 쉼을 얻지 옛날 짐 내려놓고 새 짐을 새 멍에 얹으면 어떻게 쉼을 얻나?
“짐 + 멍에“가 되어 부담이 더 늘었는데.
주님께서 짐을 다 지고 가시고 나는 그저 주님의 멍에를 메고 따라 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내 앞길 멀고 험해도 나, 주님 만 따라 가리”라는 찬송이 이해된다.
그 앞에“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라고 말씀하시었다.
나는 “온유”를 “Power under Control” 이라고 정의 한다.
사랑으로 조절, 통제되는 힘이라는 말이다.
온유하신 주님께서 내가 아주 쉽게 질 수 있게 무게를 모두 감당해 주신다는 말씀이라 생각한다.
나 혼자서 낑낑대고 끌고 가고 지고 가게 내버려 두시면
어떻게 주님께서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선언하시겠는가?
그렇게 생각하니 이 말씀이 이해가 잘된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온유하신 주님께서 그 멍에를 직접 메시고
그 한쪽을 내가 메는 시늉만 하게 하시고 모든 짐은 주님께서 다 끌고 가신다.
나는 주님께서 지우신 멍에를 메고 주님만 졸졸 따라 가게 하시는 것이라 믿는다.
남 보기에는 내가 주님과 함께 멍에를 메고 힘쓰는 것으로 보이지만
주님께서 다 져주시는 것이다.
짐이 가벼워 진 것이 결코 아니다.
주님께서 져 주시기 때문에
나는 짐을 지는 시늉만 하는 것이기 때문에 쉽고 가벼운 것이다.
열악한 선교지에서 수고하시는 선교사님께 “수고 하신다”고 말씀 하면
“주님께서 하셨습니다”라고 답을 하시는 것을 여러 번 들었다.
주님께서 짐을 져 주시는 것이다.
나는 주님만 따라가면 된다. (찬송가처럼)
그리고 마지막 날 주님께서는
“네가 나를 사랑하여 충성했노라”고 칭찬하실 것이다.
십자가 앞에 나아가 짐을 내려놓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자유롭게 가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 인생의 짐들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지 않는가?
주님께서 그 짐을 져 주시는 것이고
나는 주님의 멍에를 메는 것이다.
그러면 주님의 멍에에 매달려 방종하지 않고 경건한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찬송가 주안에 있는 나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