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곱의 항의 (성경의 해석, 문맥)

   

[창세기 29:25]
야곱이 아침에 보니 레아라
라반에게 이르되 외삼촌이 어찌하여 내게 이같이 행하셨나이까
내가 라헬을 위하여 외삼촌을 섬기지 아니하였나이까
외삼촌이 나를 속이심은 어찌됨이니이까

야곱은 라반의 둘째 딸 라헬과 결혼하려고 7년 동안 라반의 일을 했다.
7년 후 라반에게 요청하여 라헬과 혼인을 했는데
첫날밤을 지내고 깨어보니 신부는 사랑하는 라헬이 아닌 언니 레아였다.
그것을 알게 된 야곱이 라반에게 거세게 항의한다.

성경에 기록된 내용은
(1) 
라반은 라헬이 아닌 레아를 신방에 들였다.
(2) 야곱은 신방에 들어갈 때에는 전혀 몰랐다.
(3) 아침에 신부가 레아로 바뀐 것을 알았으나 이미 잠자리를 함께 했다.
(4) 그래서 야곱은 외삼촌 라반에게 항의했다.

성경은 필요한 내용을 간결하게 말하고 속사정을 구구절절 기술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가 이해하기 쉽게 매끄럽게 연결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
소설은 주변 환경, 등장인물의 감정, 심리 상태 등을 자세히 설명하여
독자가 저자의 말하고자하는 의도를 이해하도록 한다.
)
이것을 우리가 이해하기 쉽게 살을 붙이는 것이 성경해석의 한 기능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1)-(2)-(3)-(4)의 내용에 살을 붙여 스토리가 자연스럽게 한다.
사람마다 개성과 취향 이해에 따라 붙이는 살이 다를 것이다.
색(화장)도 다르게 칠 할 것이다.
개인의 경험, 느낌, 주관이 강하게 들어가 있을 것이다.
기본 줄거리에 각색 변형된 소설과 비슷해진다.
그 해석은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다.
보통은 중간 어디쯤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성경의 교훈일 수도 해설자의 왜곡된 주장일 수도 있다.

그런데 설교자는 살을 붙여 만든 이야기(설교, 자기 해석)를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내용이라고 듣는 사람들에게 주장한다.
대부분 그렇게 하는 데, 이것은 잘못이다.
유명한 목사, 설교자들도 흔히 그렇게 말하고 그 말에 감동하는 신도들도 물론 많다.
조심해야할 심각한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가벼운 내용이라면 별 문제가 없겠지만 그게 중요하고 무서운 내용이라면 큰 문제가 될 수 있다.
듣는 사람들이 성경을 읽고 생각하고 걸러내야 할 사항이다.

나도 한번 살을 붙여 보겠다.
가능한 논리적으로 모순이 없다고 생각 하는 방법으로…

(1) 레아가 라헬 대신 신방에 들어 간 것을 야곱만 몰랐다.
라반, 레아, 라헬은 모두 알고 있었다.
라반은 야곱에게 한 말과 같은 이유를 라헬에게 설명했을 것이다.
언니가 먼저 시집을 가야 한다고.
라헬은 아마 울며불며 심하게 반대 했을 것이다.
라반은 방해되지 않도록 라헬을 아마도 가두었을 것이다.

(2) 레아는 야곱이 신방에 들어 왔을 때게 자기가 라헬인 것처럼 속였다.
당시 풍습에 첫날밤에 신부가 신랑에게 말을 하지 않는 것인지 아닌지는 나는 모른다.
당시 풍습에 신부가 두건으로 머리를 가렸는지 아닌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레아도 야곱을 속이는 데 참여했다.

(3) 신부가 바뀐 것을 알게 된 야곱은 그 이유를 레아에게 물었을 것이다.
레아는 아버지 라반이 시키는 대로 했다고 말했을 것이다.

(4) 야곱은 외삼촌 라반에게 속은 것을 알고 따졌다.
이것은 그냥 성경에 기록된 것으로 이야기를 전개시킨 것이다.
내용에 무리가 별로 없다.
야곱이 라반의 술수에 넘어간 것이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레아의 입장에서 보고 이야기를 전개한다면 어떨까?
(3) 번 장면에서 레아와 동침 했다는 것을 알게 된 야곱이
모든 사태를 라반의 농간이라는 것을 한 순간에 파악하고
(야곱 참, 눈치 빠르기도 하다: 논리의 비약)

아니 처형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제가 술 취해 방을 잘못 알고 들어와 처형에게 실수를 한 것입니까?
이렇게 물어 보지도 않고 무례하고 비정하게
눈물 흘리는 레아를 뒤로하고
득달같이 라반에게 달려가서 따진다.
(각색한 소설을 쓰는 셈이다)

레아 불쌍한 여인임에 틀림없다.
야곱의 사랑을 그렇게도 받고 싶었는데 …
그런데 그 레아는 아들딸 잘 낳고 나중에 야곱과 같이 조상의 묘에 묻혔지만
라헬은 여행중 베냐민을 낳다가 죽어 에브랏 길에 묻혔다.
(성경에 기록된 일이다)
이렇게 하여 레아를 중심으로 스토리를 전개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렇게 하면 레아를 중심으로 한 살이 너무 많이 붙는다.
성경 해석의 오류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살을 붙인 스토리에서 교훈을 유도해 내고
그 교훈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듣는 사람에게 말 한다면
그것이 설혹 올바른 교훈이라 할지라도
성경 본문에서 말하는 교훈이 아니고
내 스토리의 교훈이라는 점이다.
“내가복음”, “지가복음”이 된다는 말이다.
(
물론 이 예에서 잘못된 교훈을 이끌어 낼 가능성은 아주 작다.
)
설교자는 이런 해석, 교훈의 오류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많은 사이비 교주나 그 비슷한 사람들이 이렇게 엉뚱한 살을 붙여 듣는 사람을 오도한다.
성경 내용의 뼈대를 무시하고 자기가 붙인 살, 자기만의 독특한 주장을 중요하게 강조한다.
(
물론, 이렇게 성경을 해석하고 설교하는 사람이 모두가 사이비는 아니다.
자기도 모르는 중에 범하는 이해의 오류일 것이라고 이해한다.
성경 아닌 일상생활에도 이런 오류가 참 많으니까 말이다.
그 것 조차도 네가 뭔데 그런 말을 하느냐고 반박하면 할 말이 없다.
나는 그냥 평신도니까. 종교계의 권위로 밀어 붙이면 할 말이 없다.
)
이게 연상논리의 오류이다.
마치 “원숭이 xx 는 빨개” 라는 애들 노래가 “백두산 뻗어 내려 반도 삼천리”로 끝나는 것과 같다.
(Link: 연상논리의 오류)

이런 성경 해석, 설교, 설교자를 듣는 사람은 주의해야 한다.
기독교 서적도 이런 내용의 책이 참 많이 있다.
훌륭한 분의 책에도 이런 설명이 많이 있다.

성도가 성경을 중립적인 태도로 열심히 읽어야 하는 이유이다.
성경을 읽지 않고 설교와 신앙서적(?)을 읽는 것만으로는 건강한 신앙을 유지하기 정말 어렵다.
종교 늑대들의 먹이, 희생 제물이 되기가 아주 쉽다.

물론 성경의 전문가를 자처하는 분은 더욱 더 열심히 성경을 읽고 공부해야할 것이다.

아. 나도 성경을 더 읽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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