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치기와 나팔수

     


늑대 나왔다고 거짓 외치는 양치기 많고
도둑이 와도 짓지 않는 개도 많고
적군이 온다고 나팔 부는 파수군 찾기 어려운 이 세대다.

양치기의 거짓 고함에 모두 뛰어나와 허탈하고
파수군의 나팔 소리를 무시하다가 변을 당하고
우리는 모두 이상의 오감도에 나오는 어리석은 아이들이다.

“비판하지 말라”는 성경 구절을 인용하여 사람들의 입을 막으면,
누가 나팔을 불어서 재난을 경계하나?
선지자적 의식을 갖은 사람 필요한 세대.

주님의 비판하지 말라는 교훈은
(마태 7:1-6)
1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2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3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속에 있는 티를 빼게하라 하겠느냐
5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6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

“위선을 버리고 자기를 먼저 고치고 상대의 티를 빼어주라“인데 (5절) 많은 사람이
1 절의 “비판하지 말라” 만 강조하여 말한다.
성경 말씀이니까.
그곳 한 절만 문맥에서 딱 떼어내서… 성경의 부분 강조 내지 교묘한 왜곡이다.
그리고 자기 자신은 저주에 가까운 비판과 언사를 사람들에게 쏟아 낸다.
행동도 제왕적으로 거만한 경우 많다. 정신적, 영적 횡포 아닌가?

그 1절 만 듣고 순진하게 무조건 비판을 하지 않는 분은,
내 의견에는 하나님께서 그 어린이 같은 순순한 믿음을 사랑스럽게 받아 주셔서
결국은 그에게 은혜를 베푸실 것이라고 믿는다.
그렇게 사실 분은 그렇게 사는 것도 좋겠다.

(잠언 27:6)
친구의 통책은 충성에서 말미암은 것이나 원수의 자주 입맞춤은 거짓에서 난 것이니라

그러나
에스겔서의 파수꾼이 없이 어찌 전쟁을 예비하며
나단의 책망 없이 어찌 다윗의 회개가 있을 것인가?
선지자적 의식을 가지고 죄악과 불의를 질타 지적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에스겔서 3:17-19)
17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숫군으로 세웠으니 너는 내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
18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꼭 죽으리라 할 때에 네가 깨우치지 아니하거나 말로 악인에게 일러서 그 악한 길을 떠나 생명을 구원케 하지 아니하면 그 악인은 그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 피 값을 네 손에서 찾을 것이고
19 네가 악인을 깨우치되 그가 그 악한 마음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지 아니하면 그는 그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너는 네 생명을 보존하리라

박정희는 독재를 펴면서 “역사의 심판”을 받겠다고 확신 있게 말했다.
(
진심이었을 것이다.
나는 여기서 고 박정희 대통령의 건과에 대하여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다.
)

이 말은 누구든 내를 비판하면 제거하겠다는 협박성 선언이었다고 본다.

어느 비리 목사는 매스콤 인터뷰에서 대놓고 말하기를
“하나님이 그만 두시라고 하거나 혹은 장로회에서 물러나라고” 해야 물러난다고 했다.
“해 볼 테면 해봐라 나는 그냥 버티고 있을 거야” 라는 막무가내 선언이다.
장로회는 이미 장악한 상태일 터이니까.
(쿼바디스라는 한국 영화에 인터뷰 장면이 나온다)

적군을 보면 나팔을 불어야 하고
강도가 들면 911, 112 불러서 경찰을 불러야 한다.
불이 난 것을 보면 “불이야” 외치고 119, 911 불러야 옳다.

그걸 “비판이다” 혹은 “누워서 침 뱉기다”라고 역 비판하는 것은 특권을 선점한 악한자의 궤변이라 생각한다.
주의 종이니 하나님께서 판단하실 것이니 너희(낮은 것?)들은 잠자코 있어라 하는 태도는 죄악이다.
그렇게 생각하거나 말하는 사람은 이미 주의 종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람의 비판을 들을 줄 모르는 사람은 하나님의 경고도 무시한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이 불의하게 비난하고 대적 할 때에 아무 말 없이 그 불의한 이스라엘 앞에서 하나님께 무릎 꿇어 엎드렸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징계하셨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면 비난 앞에 꿇어 엎드리는 태도가 옳다.

12 명의 가나안 땅 정탐 보고후에
(민수기 14:5) 모세와 아론이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 앞에서 엎드린지라

고라의 무리가 반역을 꽈했을 때
(민수기 16:4) 모세가 듣고 엎드렸다가

온 회중이 신 광야에 이르러서 물이 없으므로 모여서 모세와 아론을 공박할 때에
(민수기 20:6) 모세와 아론이 총회 앞을 떠나 회막 문에 이르러 엎드리매 여호와의 영광이 그들에게 나타나며

주의 종은 하나님께서 징계하실 것이니 비판을 말라는 사람은 그 비판하는 자들을 하나님께서 징계하신다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그게 타당하지 않은가?
(
성경에 주의 종을 하나님께서 명확히 징계하신 경우는 내 기억에는 없다.
이것은 사람의 말이다.
)

실제로 겸손하고 경건한 주의 종들(목사)은 교회에서 (억울한)문제가 발생했을 때 아무 해명이 없이 물러난 경우가 많다. 그리고 다른 곳에서 새로운 사역을 시작했다.
주님께서 인도 하셔서 아름답게 섬겨서 살 길은 무한히 많이 있다고 믿는다.

다윗이 사울을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자”이기 때문에 죽이지 않았다는 것을 예로 논리를 펼 수 있다.
그러면 동일하게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다윗이 쫓겨 다니며 하나님 만 찾은 것은 어떻게 설명을 할 것인가?
다윗은 그 기간 동안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 섭리를 깨달았고 위대한 시편을 노래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다윗과 같은 은혜를 받고 싶지는 않으신지?
다윗의 믿음을 본받고 싶지는 않으신지?
나는 말고 이 말을 듣는 너는 다윗의 믿음을 본받으라는 태도는 참으로 위선이다.
사람의 마음은 이기적, 편파적이다. 자기 좋은 것만 받아들이고 주장한다.
그 반대의 경우는 전혀 말하지 않는다.
이런 것을 견강부회라고 한다.
그리고 순진하게 그런 사람들의 말을 생각 없이 받아들여 반복하는 사람도 문제이다.

집안 이야기를 왜, 외부에 까발려서 망신을 자초하냐 하기도 한다.
그러면 구약의 이스라엘 민족은 왜 재를 쓰고 회개했을까?
민족적으로 다 같이 하면 덜 창피해서?
개인 적인 사안도 재를 머리에 쓰고 옷을 찢었을 것이다.
죄를 드러내는 것과 회개는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그리고 몰래 하는 것보다는 공개적으로 함이 좋다.
사회적인 영향력, 위치가 큰 사람일수록 더욱 그렇다.
병 고치기 위해 공개적으로 광고를 하지 않는가?

사안의 긴급성과 마음가짐이 판단의 기준이라고 생각한다.
비판을 위한 비판은 지양하고 토론장에서 하면 유익하겠다.

마태복음 7:6을 보면“개” 나 “돼지”같은 사람은 비판을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진주를 주고도 도리어 치욕을 당하니까…
겉으로 보아서는 “개”,“돼지”구분을 할 수 없지만 물리고 나면 놀라서 그만 두게 될지 모른다.
물려 보면“개”,“돼지”를 분명히 알게 된다.
비판하고서“악마의 자식” 이라는 저주를 들었다면 아마도 그 저주를 한 사람은 “개”,“돼지”일 것이다.

어쨋든 비판하는 사람의 마음은 무겁다.
비판하는 사람을 자기를 돌아보아야 한다.
(
비판의 교훈에 관한 내 생각.
비판과 토론이 없이는 민주주의는 불가능하다.
민주주의가 최선인가 하는 것은 별도의 문제이지만…
나는 요주의 교인 일 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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