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과 바나바의 다툼

   

[사도행전 15:36-39]
35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에서 유하며 다수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주의 말씀을 가르치며 전파하니라
36 수일 후에 바울이 바나바더러 말하되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하니
37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38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한가지로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39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 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

안디옥 교회에 머물러있던 바울과 바나바 사도.
전도한 교회의 갓 믿은 형제들이 궁금하다.
가서 만나보고 믿음을 견고하게 세워주고 싶었다.
그래서 선교 여행을 다시 떠나고 자하는 데,
요한 마가를 팀의 일원으로 데리고 갈 것인가 하는 것으로 의견이 갈린다.

아마 바울은 목표의식이 투철하여 마가는 선교팀의 일원으로 부적절하다 생각했을 것이다.
바나바는 조카 마가를 애정으로 믿음을 키워 주어야할 주님의 사람으로 여겼을 것이다.
사람인 마가의 믿음의 하나님의 사람으로 키우는 것이 그의 목적에 있었을 것이다.
아마 의견을 좁히려고 논의하다 서로 심하게 싸우고 헤어졌을 것이다.
상대가 자기 의견에 승복하도록 설득하다 감정이 격해져서 싸웠을 것이다.
(얼마나 심하게 싸웠으면 “서로 심히 다투었다”고 기록했을까?)

나라가 분열 되는 것과도,
어떤 집단이 나누어지는 것과도,
교파 나누어지는 것과도 비슷하다.

나는 이것을 바울의 확신 지향주의에 의한 과오라고 생각한다.
확신 지향주의라기 보다는 성향 지향주의라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우리는 자기의 성향을 소신, 확신으로 오해하는 때가 많다고 본다.
바울의 인간적인 면이 나타난 장면이기도 하다.
(바울이 모든 면에서 완벽했다면 후세 사람들에게 낙심 될 지도 모른다.)
물론 바나바도 마찬가지다.

상대의 견해를 틀린 것이 아니고 다른 것이라고 인정했다면,
(오래 함께했던 믿을 만한 동역자가 아닌가?)
싸우지 않고 평화롭게 서로 다른 방향으로 떠났을 것이다.

한 편의 지도권이 상대적으로 매우 강력했다면 다른 편은 불만을 참고 따랐을 것이다.
아마 이 때에 사도 바울의 지도력이 바나바를 넘어서는 때일 것이라 생각한다.
두 개의 방향이 다른 지도권이 충돌하는 순간이다.

바울은, 이 중요한 때에 효과적이 복음의 전파가 최우선이라고 주장했을 것이다.
바나바는, 주 안에서 한 사람이라도 견고한 일군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을 것이다.
서로 양보할 수 없었다.
(
나는 바울이 양보하는 것이 좋았다고 생각한다.
일을 이루시는 분은 주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울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
그렇다면 우리 각자 헤어져서 서로 잘 해보도록 하자.
이렇게 되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상대방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 생각해서 심히 다투고 갈라선 것이다.
차이점을 전혀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전도 팀의 종합적 역량은 일단 절반 이하로 줄었을 것이다.
이후 사도 바울의 수고가 배가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물론 사도 바울의 지휘권은 대폭 강화되었을 것이다.
바울도 얼마 후에 후회했다고 생각한다.
나중에 그가 쓴 편지들을 보면 알 수가 있다.

바울도 자기가 전도한 사람은 애타는 마음으로 매어 달렸다.
개인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그의 서신에서 역설한다.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세운다 했다.
[골로새서 1:28]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성도 한 사람 누구든지 약하면 자기 애가 탄다고 했다.
[고린도후서 11:29]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하지 않더냐

바나바와 싸울 때의 마음가짐으로 이런 말을 했다면
바울은 이기적이고 앞뒤가 맞지 않는 이율배반적인 사람일 수밖에 없다.
두고두고 후회했다고 본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빌립보 성도들에게 교회의 평화를 지키는 것을 강조할 때
소신껏, 확신껏, 믿음껏 하라고 권고 하지 않았다.
바나바와 싸울 때의 마음가짐이라면
“주안에서 담대히 소신을 가지고 담대히 행하라” 라고 말했어야 한다.
아마도 바나바와의 사건을 후회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와 반대로 서로 용납하고 화평하라고 했다.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했다.

그의 과거 행동으로 본다면 이 말은 모순 아닌가?
분열을 감수하고라도 소신을 지키라 라고 해야 하지 않나?

[에베소서 4: 2,3]
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빌립보서 2:14]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사역에 옳지 않다고 했던 마가가 자기에게 유익하다고 말한다.
그동안 마가는 자타가 공인하는 주의 종이 되었을 것이다.
마가복음의 저자이기도 하다.
[골로새서 4:10]
나와 함께 갇힌 아리스다고와 바나바의 생질 마가와 (이 마가에 대하여 너희가 명을 받았으매 그가 이르거든 영접하라)
[디모데후서 4:11]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
이런 견해를 죄 가운데 있는 지도권이 아전인수 격으로 악용하여
주안에서 화평 중에 내게 순종하고 나를 따르라고 주장 하는 것을 반대한다.
그것은 양의 탈을 쓴 늑대의 주장이다.
)

우리는
공동의 핵심 가치를 인정할 때 하나가 되며
서로의 차이점을 인정할 때 화평, 조화를 이룬다.

핵심 가치와 차이점은 서로 반대편에 있을 수 있다.
민주주의의 핵심 사상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다양성의 하나님이시다.
획일성의 하나님이 아니시다.

그렇지 않으면 그릇된 확신(?)에 의한 분열이다.
사람은 우리는 자기의 욕망이 강할 때 그것을 확신으로 생각하거나
하나님의 듯이라고 착각하고 우기는 경우가 매우 많다.

교회와 사회 현상을 보면서
정치와 사회에 둔감한 내가 생각한다.

사도 바울 같은 분도 이런 과오를 저지르고 한참 지나고 나서야
자신의 실책을 깨달은 것 같다.
그러니 나와 같은 범인은 얼마나 더 심할 것인가?
나는 언제나 주님의 보호하심이 필요한 존재이다.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는 언제나 내게 유효하다.

[마태복음 6: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사도행전을 읽으며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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