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끼와 거북 (억지 논리)

 


토끼와 거북이 경주를 한다.
이 때 토끼는 거북보다 두 배 빨리 달린다.
그래서 거북은 토끼보다 100m 앞서 출발한다.
이 경주에서 토끼는 영원히 거북을 따라 잡을 수 없다.

이유는
토끼가 100m 달려 거북이 있는 곳에 가면 거북은 50m 앞서 있다.
토끼가 또 50m 달려가면 거북은 25m 앞서 있다.
토끼가 또 25m 달려가면 거북은 12.5m 앞서 있다.
따라서 토끼는 영원히 거북을 앞설 수 없다.

이 논리가 모순인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토끼가 거북을 앞지른 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런데 논리적으로 반박할 수가 없다.
왜 그럴까?
(생각해 보세요)
.
.
.
.
.

이 논리에는 시간이라는 말이 없다.
경주의 결정적 요소인 시간이라는 말을 쏙 빼놓고 논리를 편 까닭이다.

말(전제)을 이렇게 바꾸자.
토끼는 10분에 100m 달리고 거북이는 10분에 50m 달린다.
거북은 토끼보다 100m 앞서 출발한다.
10분이라는 시간을 넣었지만 처음과 같은 내용이다.

그러면
10분 후 토끼가 100m를 달려 거북이 있던 곳에 도착하면 거북은 50m 앞 서 있다.
다시 10분 토끼가 100m를 달려가면 거북은 먼저의 50m, 이번 50m 해서 100m 지점에 있다.
둘 다 토끼의 출발점에서 200m 지점에 있다.
출발 20분 후 토끼는 거북을 만난다.
그 후 토끼는 거북을 앞지른다.

앞에서 논리의 모순은 달리기에 시간과 거리를 함께 넣어 논리를 펴야 하는 데
고의적으로 시간을 빼고 거리만 가지고 논리를 폈기 때문에 오류가 생긴 것이다.
이런 사람은 원래 논리를 비틀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기에
시간을 이야기 하면
“시간은 말하지 말아. 생각해봐 아무리해도 토끼는 거북에게 도달하지 못하잖아?”
라고 우기게 마련이다.

이런 모순적인 억지 논리를 펴는 사람들이 참 많다.
자기의 논리를 주장하려고 다른 필수 요소를 무시한다.
(
고의로 무시하는 수도 많고,
몰라서 무식해서 그런 수도 많다.
살면서 이런 경우 아주 많이 본다.
매우 그럴 듯해 보인다.
부끄럽지만 나도 그런 주장을 했을 것이다.
)

내 생각에
기독교에 많이 알려진 것으로는 “예정론” 과 “믿음=자유의지론” 이다.
두 개의 극단은 모두 억지 논리의 모순이다.
특별히 극단의 예정론을 주장하는 곳에 억지 논리가 더 심하다.
(
지금은 극단적인 예정론을 주장하는 사람은 적을 것이라 생각한다.
토끼 거북 경주 이야기처럼 매우 억지로 보이지 않나?
아직도 그런 분들이 많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

성경에 기록된 예정에 관한 말과 믿음(자유의지?)에 관한 말을 찾아보았다.
(쓸 데 없는 짓을 했나?)

내가 찾아 본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정하여 택하셨다는 말(?)은
교회와 긴밀하게 관련하여 쓴 에베소서에 4 번 나온다.
그중 한 번(엡3:11)은 개인이 아닌 교회에 대한 예정을 말한다.
– 내가 이해하는 한, 그 부분이 교회에 대한 언급이니까 –

반면에 성경에 “믿음”이란 단어는
신약에서 모두 명사로만 200번 이상, 동사로는 아예 세지도 않았다.
또한 이“믿음”은 예수님께서 직접(복음서에서) 명령하신 것이 매우 많다.
하나님께서 구약에 애가 타도록 믿으라고 말씀하신 것은 훨씬 더 많다.

“예정”이란 개념으로 “믿음”과 같은 중요한 개념을 덮어씌우는 것은 억지다.

이“믿음”이라는 말을 “믿음=하나님 절대 주권과 예정에 의한 은혜”라는 개념으로
무조건 대치(덮어씌워) 주장함은 엄청난 억지이다.

성경에 200번 이상 나오는 “믿음”을 단 4번 나오는 “예정”에서 유도된 개념인
“하나님 절대 주권과 예정에 의한 은혜”로 바꾸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전지전능을 믿는 믿음에서 출발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생각으로 바꾸는 오만의 오류에 빠지게 된다.
심하게 말하면 하나님의 위치에 자기가 오르는 오만이며 범죄이다.

이것이 극단적인 예정론의 억지 인 것이다.
마치 토끼와 거북의 경주에서 시간이라는 개념을 쏙 뺀 것과 같이
예정이란 말로 믿음이라는 말을 완전히 무시한 결과이다.
그러면서 예정하셨다는 말이 성경에 있으므로 성경적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억지)
다른 것에 대해서 이런 비슷한 주장을 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나는 “믿음”이란 말이 성경에 200 번 이상 나왔다고 해서
4번 나온 “예정”이란 말은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200 번 보다 작다 해도 4 번이면 무시할 수없이 중요한 개념이다.

둘 다 성경(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인정하고 성경의 기록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다면
두 단어 “예정” 과 “믿음”을 동일하게 인정해야만 한다.

에베소서 2:8 처럼 그냥 동일하게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에베소서 2: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나는 칼빈이 예정이라는 개념을 정말로 믿음 보다 위에 두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후대 사람들이 교조주의에 집착하여 예정이란 말로 믿음을 덮어씌웠다 생각한다.
물론 나의 추측이다.
만약에 칼빈이 그와 같은 논리를 폈다면 그의 논리(신학)는 억지 이며 비성서적이다.

믿는 사람은 자기가 속한 집단, 종파의 교리를 무조건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그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이라 믿는 성경에 근거한 것인지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한다.
그래서 성경에 근거한 것이면 받아들이고 아니면 무시해야 한다.
따라서
성경을 전체적으로 문맥을 따라 열심히 읽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믿는 사람의 중요한 의무이다

목사, 목회자는 입장이 매우 다르다.
교단의 교리를 믿는다 고백하지 않으면 목사로 인정받지 못할 것이다.
이것이 그들의 안타깝고 어려운 점이다.
평신도는 그런 것에서 자유롭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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