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자역학-물질파 이야기

    


늙은 내 머릿속에 갑자기 쓸데없는 생각이 난다.
(건망증으로 잊기 전에 얼른 적어 놓는다)

먼 옛날 50년 전 쯤 공부했던 구름 잡는 이야기 양자역학 드 브로이의 물질파.
(드 브로이: de Broglie – 프랑스 물리학자)

세상 만물은 그 존재의 확률이 파동으로 진동하며 이동한다. 그것을 물질파라 한다.
즉, 요렇게 존재하며 이동한다는 말씀이다.
(이것을 wave-packet 이라고 한다)

wave-packet의 이동

진동이 큰 곳에는 존재할 확률이 높고 (있기 쉽고)
진동이 약한 곳은 존재의 확률이 낮다. (거의 없다)
이게 말이 되나 ?
내가 덜덜 떨면서 깜빡깜빡 하면서 존재하며 이동한다는 게 말이 되느냐 말이다.
물리학 법칙, 양자역학 법칙에 의하면 변함없는 진리이다.

  


물질파의 공식에서 h (플랑크 상수) 는 대략 6.6 / (10 0000 34개) 의 아주 작은 수이고
내 잘량(몸무게)은 60Kg 쯤 되니까
내 물질파 파장은 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6 정도가 될 것이니 거의 0 이라는 말이다.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파르르하고 확률이 진동하고 있으니 그 자리에 확실히 존재한다는 말이다.
즉 나의 경우는 물질파고 뭐고 없이 지금 있는 그 자체가 100% 그 자리에 존재하고 있다는 말이다.

플랑크상수 수치 보다 체중이나 속도가 아주 큰 현실 세계에서는 양자역학적 현상이 일어나도 전혀 느낄 수 없이 미미하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 물질파의 공식이 전자와 같은 아주 작은 크기가 되면 문제가 달라진다.

전자의 질량은 9.1 / (1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 (31개) 의 크기이니까.
전자의 물질파의 파장은 1m 가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전자가 초당 1 cm씩 움직인다면)
그러면 눈에 보이지도 않는 전자는 파장의 지름이 1m 이상의 공간 속 어디에 존재하며 이동한다는 말인가?

    

전자가
위의 그림과 같이 Wave-Packet으로 그 존재의 확률이 진동하며 이동한다는 것이다.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 말을 못하고 그 공간 어디에도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양자역학과 고전 물리학은 둘 다 물리학이며 물리학적인 진리를 묘사한다.
그리고 현실에서 그대로 진리임이 증명된다.

그런데 그 진리임이 증명되는 범위가 매우 다르다.
전자 이하의 매우 작은 입자(소립자)의 세계에서는 양자물리학(양자역학)으로 현상이 설명된다.
그 크기의 기준이 되는 숫자는 플랑크상수이다.
1/(1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 0이 34인 되는 아주 작은 크기의 물체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이 극미의 세계에서
전자는 확률의 파동으로 존재하며 이동하고 여기에도 있고 저기에도 있으며 또 여기에도 없고 저기에도 없다.
오직 확률로만 존재한다.
그래도 확률은 일단 발생하면 실현되는 것이기 때문에 100% 확실해지고 확률은 사라진다.
그래서 어떤 방법으로 전자를 관찰할 수 있다면 그 관찰한 위치가 100% 전자의 바로 그 순간(과거)의 위치가 되고 즉시 전자의 새로운 위치는 확률의 파동으로 밖에 표현할 수 없는 존재가 된다.
거시세계에 익숙해 있는 우리로서는 전혀 이해할 수가 없는 세계가 양자 역학의 세계이다.

그러나 양자 역학의 공식 예를 들면 드브로이의 물질파 공식에 10 Kg 짜리 쇠망치를 대입하면 물질파의 파장은 거의 0이 된다.
존재 확률의 물질파가 제자리에서 진동한다는 말이다.
다른 말로 하면 가만히 있는 쇠망치의 위치는 항상 제자리에 변치 않고 있다는 뜻이 된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경험하는 것과 완전히 같다.

양자물리학으로 고전물리학은 완전히 조화롭게 설명이 되지만 그 반대는 너무나 어렵다.

커다란 물체에는 애매한 불확정성이란 것은 존재할 수 없다.
물체의 크기(질량)에 의해 완벽하게 압도 되어 모든 것이 확정된다.

그래서 우리는 두 세계를 별개인 것처럼 이해하는 것이다.

세상을 살면서도 두개의 상황을 서로 다른 관점에서 따로 따로 이해해야 하는 경우가 있지 않나 생각한다.

또 성경을 읽으면서도 두 가지 종류의 상황을 따로 따로 이해해야 하는 경우가 있다고 생각한다.
성경에서 크게 외치고 누누이 강조하고 있는 내용은 성경에 써있는 그대로 믿음으로 확실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옳다.
예를 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죄의 용서 같은 것은 다른 방법으로 설명해서는 아니되며 무조건 믿음으로 받아들임이 타당하다.
성경에 너무도 크게 동일하게 여러 번 외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경에 비슷하게 빗대어서 간접적으로 한 두 번 혹은 몇 번 변죽을 울리는 듯한 내용은 여러 사람이 여러 가지 말로 설명을 할 수 있는 데 그런 것을 가지고 왈가왈부하는 것은 시간의 낭비가 될 수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성경의 기록이 대략 A에서 맴도는데 그 진실은 B 혹은 b 라고 해도 할말은 없다.
그러나 기록된 내용에서 아주 멀리 벗어나면 (c 혹은 C 같이) 그런 것은 곤란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것이 성경의 문맥을 머얼리 떠난 엉뚱한 해석이 된다.
성경해석을 c 혹은 C 같이 본문과 아주 머얼리 떠나서 기차게 해석하는 분들이 많이 보여서 하는 생각.

이런 것은 성경의 해석이 아니고 자기의 상상의 소설을 성경 해석이라고 하는 것이 아닐지?
(요새는 그런 것을 뇌피셜이라고 하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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