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구원 경륜-3(부활)

 

나는 성경에 보여주신 하나님 구원의 경륜을 믿는다.
그 성경에 세상 만민을 위한 메시아의 예언이 있다.
그 성경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라 믿는다.

여기서 엉뚱한 의문이 떠오른다.
구약 성경의 메시아의 예언이 예수님에게서 성취되었다고 말을 하고
성경을 읽어 보면 그런 것 같기는 한데 그 예언이 꼭 예수님께만 해당 되는 것일까?

예를 들어 이사야 9:6은 메시아의 예언이라고 일반적으로 말 하지만
(찬송가 뒤 교독문에도 있어서 성탄 때 마다 교회에서 읽는다)
그것이 이사야서 뒤쪽의 히스기야 왕을 예언한 것이라 말하는 사람도 봤다.
성경을 문맥을 따라 읽으면 그 주장이 설득력이 없는 것이기는 하지만
구약 성경 역사서와 이사야서를 읽어 보면 얼핏 생각에 그럴 듯하기도 하다.
(이사야 9:6-7)
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7.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이와 같이 성경의 많은 예언이 인류의 좁게는 유대인의 그 이후 역사에 나타난
어떤 특정인의 특정 사건에 해당 된다고 말해도 딱히 할 말이 없을 수 있다.
(우리는 역사에 일어난 세세한 구체적인 부분은 거의 모르지 않나?)
예언의 문학적 표현 함축성 모호성으로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가 될 수 있다.

따라서 구약의 메시아 예언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성취 되었다는 확실한 증거가 있어야
그 예언과 그 예언을 포함하고 있는 성경의 진실성 및 권위를 갖게 된다.
성경의 진실성 및 권위는 항상 도전을 받아 왔다.

나의 질문이 불경건하고 불신앙인가?
불신의 질문이라고 해도 이런 진지한 질문에 대하여는 답을 해야 하지 않을까?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구약성경(모세, 선지자의 글)에 예수님의 영광(부활)을 썼다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부활이 성경 예언의 성취이며 성경이 진실성과 권위가 있다고 예수님 자신이 논증하신 것이다.
(누가복음 24:25-27)
25. 가라사대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26.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27.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사도 바울도 예수께서 성결의 영으로는 부활하심으로 하나님 아들로 인정 되셨다 라고 했다.
(로마서 1:4)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야 말로 능력, 권위, 진실의 증거라는 주장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성경이 하나님의 권위 있는 진리의 말씀이며 그 성경이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한다는 확실한 증거가 된다.

수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그 부활을 본 증인이라고 했다
(고린도전서 15:3-8)
3.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4.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
5.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 두 제자에게와
6.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태반이나 살아 있고 어떤이는 잠들었으며
7.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8.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성경의 근원을 따라 가면 수많은 저자들이 있고 따라서 저자에 관한 진위 논란이 자연스럽게 나온다.
구약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조각 조각난 사본을 이리저리 모아 붙여서 구약 성경을 편집했고
그 전에는 중근동 메소포타미아 지방의 구전 설화 신화가 도입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브라함이 먼 옛날 메소포타미아 갈대아 우르 사람이었기에
당연히 당시 사람들의 생각이 그의 마음속에 있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
  성경의 권위를 훼손하는 신학자를 포함한 사람들의 주장 두 가지 ?
  (1) 구약 성경이 메소포타미아의 길가메쉬 서사시에서 영향을 받았다.
  따라서 중근동의 설화 신화가 많은 부분 들어 있다. 신화라고 말들 하던데 …
  대홍수 이야기, 영원한 젊음(생명)을 구하는 이야기가 있다.
  어쨌든 그 생각에 뭐라 반박하기 어렵다.
  시간 많은 은퇴 늙은이니 책 읽기 싫어하는 내가 그나마 책을 읽어 볼 수 있었지만.
  모든 것을 내가 따라다니며 연구 조사한다는 것도 불가능 하다…
  (2) “아브라함의 이야기 자체가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그러므로 신화다” 라는 것인데 …
  두 분이 서로 토론을 했으면 좋겠다.
  모두 성경의 권위를 훼손하려는 의도가 있으므로 토론이 없이 서로 서로 존중할 것 같다.
  뭐 토론을 해도 서로가 증거가 없으니 결론 없는 논쟁이 될 것이다.
  그것도 내 상상 속 그들의 모순이다.
)

창세기는 현대 과학의 연구 결과와 당연히 어긋나 신화(지어낸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신약의 많은 부분에도 그런 기록이 많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중요하다.
바울의 말대로 성결의 영으로는 죽음에서 부활하여 살아계신 하나님으로 인정 되셨다는 말이다.
그렇게 되면 부활을 포함한 예수님께 대한 성경 예언은 진실 된 예언이며
성경은 믿을만한 진리의 말씀이라는 정당성을 과학과는 다른 차원에서 갖게 된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은 매우 중요하며
그런 이유로 예수님의 부활을 본 증인들은 확신을 가지고 부활을 증언했다.

(고린도전서 15:13-20)
13.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
14.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15.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거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지 아니하셨으리라
16.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
17.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18.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19.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 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 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그 때는 한두 사람이 아닌 많은 사람이 두 눈으로 직접 봤다고 하는 데,
(오랜 기간 동안 집단 최면에 걸린 것도 아닐 테고.)
또한 정말로 확신 있게 주장을 했고, 따라서 듣는 사람이 “믿을까 말까“에서 “믿는다”로 결정했을 것이다.
예수님 자신의 주장, 사도 바울의 증언, 수많은 증인들의 증언이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한다.
초대 교회는 그렇게 부활 신앙으로 전파되고 성장했다.

그로부터 2000여년이 흘렀다.
예수 그리스도 전에도 후에도 죽음에서 부활한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의 사실은 계속 도전을 받는다.

예수님의 부활은 지금은 역사가 되어서 신약 성경에 기록되어있다.
현대인인 나, 그리스도인은 2000년 전 부활의 증인들의 증언을 세월을 건너, 건너
신약 성경에서 읽고 예수님을 믿었다.

신약 성경의 부활의 기록을 의심하면 사실에 근거한 논리적 정당성을 잃어버리게 된다.
결국은 성경을 믿음으로 받아 부활을 믿고 부활을 믿어 구약 성경의 정당성을 믿고
믿음의 터를 세운다는 순환 논리의 오류에 도달한다.
3단 논법의 오류에 빠진다.

(
  생각하고 또 생각했는데 결국은 논리적 증명이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는 바로 이 시점에서
  욥과 같이 하나님의 절대 섭리를 인정하고 그 앞에 겸손히 무릎을 꿇어야 한다.
  (욥기 42:2,3)
   2. 주께서는 무소불능하시오며 무슨 경영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줄 아오니
   3.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우는 자가 누구니이까 내가 스스로 깨달을 수 없는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 없고 헤아리기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성경의 진실성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나처럼 복잡하게 생각하고 고뇌 끝에 믿는 것 보다
  어린 아이처럼 단순하게 믿는 것을 칭찬하셨을 것이다.
  (마태복음 18:3)
  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나 나는 복잡하게 논리적으로 파고드는 사람인 것을 어찌하랴.

  결국은 귀신들린 아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나온 아버지처럼 주님 앞에 엎드려 외치게 된다.
  (마가복음 9:24)
  곧 그 아이의 아비가 소리를 질러 가로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하더라
)

나는 성경의 기록을 따라 믿음의 선진들로부터 전해, 전해 내려오는 부활 신앙을 믿고,
성경의 기록이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침이라 믿고 성경의 진실성을 믿어 그 위에 믿음의 기초를 세운다.
예수님의 부활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마지막 정점 화룡점정이다.

기독교를 부정하려는 사람은 예수님의 부활을 부인하고 그래서 성경의 진실성을 부인할 것이다.
우리는 예수그리그도의 부활을 믿으며 그 부활의 하나님 계획을 말한 성경을 믿으며
그 기초위에 우리의 믿음을 쌓아간다.

성경의 진실성과 예수님의 부활은 과거에도 그랬을 것이고 앞으로도 많은 도전을 받을 것이다.
기독교 신학자들로 부터 내부로부터 도전을 받았을 것이고 앞으로도 받게 될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을 별일이 아닌 것으로 만들기 위한 죽은 사람을 살리려는 부활의 시도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나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으며 그 기초위에 믿음을 세워나갈 것이다.
아무리 믿을 만한 증거라 할지라도 위증으로 몰아가며 믿지 않으면 논증은 아무 소용이 없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이라는 입장에서 말하면
나는 (부활을) 믿는다 따라서 나는 (믿는 자로) 존재한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하나님 구원 계획의 마지막 일격(화룡점정) 이다.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 후 2000년이 지난 지금은 성경의 기록 밖에는 부활의 증거가 없다.
부활을 믿으면 성경의 기록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최종적인 권위를 갖게 된다.
이것은 순환 논리의 모순이다.
(마치 유클리드 기하학의 공리와 같다)

과거에 수많은 부활의 증인이 있었다 할지라도 논증은 불가능하고 믿음으로 결단을 해야 한다.
처음부터 신앙은 과학적인 사고로 논증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음으로 성경의 진실성을 믿게 되는 것이다.
과학적 논리적 근거는 비록 많은 부활의 증인이 있었다 할지라도 2000여년이 지난 지금 희미한 기억처럼
그 근거가 점점 희박해졌다.
보지 않았으니 참인지 거짓 증언인 줄 어떻게 알겠느냐고 반문 할 것이다.
사람들은 세상의 오래된 다른 (날조된?) 역사를 그렇게도 잘 믿으면서도
성경의 기록은 위증이며 날조라고 모순된 주장을 해도 별로 할 말이 없다.
(
  이것은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들의 부활의 증언을 거부하는 논리적 오류이다.
 믿으려 하지 않는 것도 그의 선택적인 믿음이다.
)

결국, 우리는 하나님 앞에 엎드리게 되고 믿음을 구하여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된다.
(로마서 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지금은 성경의 기록 밖에는 증거가 빈약하다.
그래서 선택을 해야 한다.
“믿음”이냐 아니냐?
그렇기에 하나님은 그렇게 믿으라고 성경에 말씀하시고 선택을 요구하신다.

덴마크의 철학자 키엘케고르는 말했다.
“이것이냐 저것이냐 선택의 순간은 엄숙하다”

“믿느냐 마느냐 선택의 순간은 엄숙하다”

우리는 매순간, 의식하든 않든 이것이냐 저것이냐를 선택하게 된다.
인생의 몇 번 중요한 시점에서 엄숙한 선택을 할 것이다.


이 순환논리의 모순 앞에서 우리는 엄숙한 선택을 해야 한다
“이것이냐 저것이냐?”
예수그리스도를 “믿느냐 마느냐?”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느냐 마느냐?“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으며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는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인류 구원의 계획의 정점임을 믿는다.
그리고 예수그리스도께서 온 인류의 구세주임을 믿는다.

욥과 같이 하나님의 절대 섭리를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 겸손히 무릎을 꿇는다.
(욥기 42:2,3)
2. 주께서는 무소불능하시오며 무슨 경영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줄 아오니
3.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우는 자가 누구니이까 내가 스스로 깨달을 수 없는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 없고 헤아리기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그리고 나의 믿음 없을을 도와 주시기를 기도한다.
(마가복음 9:24)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읽어보니 대홍수 이야기, 영원한 젊음(생명)을 구하는 이야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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