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을 때 감동이 없었어도 (4) 회개. 왜 그게 인상 깊을까?

 

믿을 때 감동이 없었어도 (4) 회개. 왜 그게 인상 깊을까?

“그러면 죄를 (낱낱이) 회개하고 구원 받는다”는 이야기는 어떻게 우리의 정서에 자리를 잡았을까?

성경에도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으라는 말이 엄연히 있다. 그래서 일까?
성경을 한번 살펴보았다. (일단 신약에서…)

[마태복음 3:2]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였으니

[마태복음 4:17]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시더라

[마태복음 27:25]
백성이 다 대답하여 가로되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하거늘

[사도행전 2:38]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사도행전 3:19]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사도행전 3:15-18]
15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로라
16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17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여서 그리 하였으며 너희 관원들도 그리 한줄 아노라
18 그러나 하나님이 모든 선지자의 입을 의탁하사
자기의 그리스도의 해 받으실 일을 미리 알게 하신 것을 이와 같이 이루셨느니라

[사도행전 7:52-53] (2절 부터)
52 너희 조상들은 선지자 중에 누구를 핍박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저희가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53 너희가 천사의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

마태복은 3:2 마태복음 4:17 의 회개는 메시야이신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천국이 가까웠으니
이스라엘 민족으로 하여금 역사적 민족적인 죄를 회개하고 메시야를 맞으라는 메시지로 이해된다.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은 지도자로부터 백성에 이르기 까지 메시야를 공적으로 거부하고 배척한다.
마태복음 27:25
그래서
사도행전 3:15-18, 사도행전 7:52-53 (2절부터)
베드로도 스데반도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 그리스도를 죽인 죄악을 회개하고
주님을 믿을 것을 강조하고 있다.
사도행전 2:38, 사도행전 3:19

“그러므로” 라는 말이 그래서 나온 것이다.
쓰지 않지만 이디오피아 내시, 고넬료, 빌립보 간수 가 구원 받은 기록에서는
회개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
그들은 과거에 메시야를 알지도 못했고 배척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유대인이 아닌 우리가 어떤 모형을 따르는 것이 타당한지 알 수 있다.
그리고 성경에는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 구원 받는 원리라고 할까하는
구절에는 회개라는 말이 별로 없다.

예수님을 믿을 때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는 것은 물론 매우 중요하다.
죄인인 때문에 하나님을 떠나 지옥 가게 되었는데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로 구원을 받으니.
죄인임을 인정하고 예수님을 믿는 것이 당연하다.

(1) 누구는 지은 죄가 너무 부끄러워서 펑펑 울며 예수님을 믿고,
(2) 누구는 예수님 은혜가 고마워 자기가 죄인임을 인정하고 예수님을 믿을 수 있다.
그런데 내가 생각해도 (1)이 더 멋있어 보인다.

그래서 구원 받은 예를 말 할 때 그런 분들의 경우가
잘 기억되고 멋있고 바람직하게 느끼는 것 아닐까?
게다가 유대인들의 모형이 사도행전에 기록 되어있지 않은가?

나는 예수님을 믿을 때 눈물을 펑펑 흘리며 심각하게 통회했다는 말을 들으면 이렇게 생각한다.

(1) 예수님을 안 믿었을 때도 양심이 참 깨끗한 분이어서 죄에 대해 매우 심각 하구나.
(흔치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그 간 왜 예수님을 더 일찍 못 만났을까?“ 논리적으로 이상하다는 생각을 한다.

(2) 죄를 참 많이 지은 것을 깨달아서 저렇게 회개하는 구나. 그러니 그대로 믿어 주는 것이 좋겠다.
하지만, 사람의 양심이 그렇게 순간에 바뀌기가 쉬운가?
내 경험에 의하면 양심은 오랜 기간 갈고 닦아야 순화된다.
그게 예수님 닮아가는 것(聖化) 아니겠는가?
이것도 논리적으로 좀 이상하다.

그래서 내 말은 예수님을 믿는데 죄인임을 인정하면 되고,
“심각한 죄의 통회“를 우선적으로 강조 말고 또 그런 것에 마음이 혼돈되지 말자라는 뜻이다.
(너무 논리적인가?. 그냥 믿으면 되니 신경 쓰지 말자)

믿은 뒤 죄를 떠난 경건한 삶을 힘쓰는 것이 중요하다.

순서를 바꾸는 것은 사탄의 속삭임이다.
(내 스스로) 죄를 깨끗이 하고 주께 나오면 주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나는 가만히 있어도)
내가 자동적으로 죄를 떠나 거룩하게 살 수 있게 해 주신다? 참이 아니다.
매력적이지만 아니다.
그러면 예수 믿기 참 힘들 것이다.
자기 죄를 스스로 깨끗이 할 수 있는 사람이 그 누구란 말인가?

내 죄를 그대로 인정하고 그냥 예수님을 믿으라.
(찬송가도 있다. “내 모습 이대로 주 받으옵소서”)

그 후 다시 죄를 짓지 않도록 혼신의 힘을 다해 살라.
결코 쉬운 일 아니다.
물론 주님께서 죄를 벗어나 살 수 있도록 함께하신다.

[요한 8:11]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

[히브리 12:4]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 까지는 대항치 아니하고

왜 “내가 ‘심각한 죄의 통회’ 혹은 ‘참회’에 이렇게 신경을 쓸까?”
생각해 보면 나는 예수님을 믿을 때 그런 것을 한 적이 없다.
그런데 부흥회, 개인 구원 간증 혹은 책 같은 것을 보면
아주 심각하게 죄를 참회하고 예수님 믿어 구원 받았다는 이야기가 많다.

그래서 나는 나의 믿음의 근거, 정당성, Identity를 확인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내가 틀렸을까?,
내 구원은 가짜거나 질이 낮은 걸까?”
이 질문에 대답을 하기 위해서는 성경을 자세히 읽어 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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