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타고라스의 화장실과 Root 2

 

(피타고라스네 화장실 문 무늬?)


어느 날 피타고라스께서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고 계셨다.
(
볼일 본다고 말하면 한국 사람은 다 이해를 잘 하지먄
다른 나라 사람은 전혀 이해를 못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천박해도 “xx 싼다” 해야 쉽게 알아듣지….
문화의 차이 때문에 볼일이 뭔지 어찌 알겠는가?
쉽게 말해 피타고라스가 변소에서 xx 누고 계셨다.

성경을 읽다가 내가 이해가 어려웠던 구절 중 하나는 “발을 가리운다“ 라는 표현이다.
[사사기 3:24] 왕이 분명히 서늘한 방에서 그의 발을 가리우신다
“He is only relieving himself in the cool room.” (NASB)
[사무엘 상 24:3 개역한글] 사울이 그 발을 가리우러 들어가니라
Saul went in to relieve himself (NASB)
아마 옛 히브리인의 관습적인 표현일 텐데 한국 사람인 나는 통 알 수가 없다.
성경에 천하게 “xx을 누다“라고 쓰기에는 곤란하지 않은가?
그래서 짐작하건 데 “낮잠을 자다”, “xx를 누다” 등등을 “발을 가린다”라고 쓴 것 아닐까?
학자들이 연구해서 알아낼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것이 재미있는 분들도 있을 터이니 말이다.
)

아마도 변비가 있으셔서 오래 오래 앉아 계셨나 보다.
그렇게 볼일을 볼 때 머리가 잘 돌아가는 분 많은 데 피타고라스님도 그랬나 보다.
화장실문 격자무늬를 보면서 뭔가 발견을 하셨다.

격자 무늬의 직각 삼각형에서
(가로 제곱) + (세로 제곱) = (빗변 제곱)
아닌가?
이해가 않 되시는 분은 그림에서 작은 삼각형의 수를 세어서 더해 보시라.
(하늘색 a 제곱:4) + (초록색 b 제곱:4) = (노란색 c 제곱: 8)
그렇게 …
피타고라스의 정리를 발견하신 것이다.

(
역시 고상하신 분은 화장실에서 볼일을 봐도 진리를 찾아내고
나 같이 천박한 사람은 xx 만 만드는구나 !
이 이야기는 웃자고 만든 제 이야기입니다.
사실 아닙니다.
이런 것으로 시시비비를 따지지 마시길 …
)
그렇게
정 사각형 안에는 Root 2라는 숫자가 숨어있다,

정 삼각형 안에는 Root 3이란 숫자가 숨어있다.
정 육면체 안에는 Root 2와 Root 3의 숫자가 숨어있다.

A4 용지의 가로 세로 비율은 대략 Root 2 (279.4 / 215.9 = 1.414)이다.

원 속에는 파이 라는 숫자가 들어 있다.
원의 지름과 둘레길이의 비율은 파이 이다.

이 숫자는 성경에도 나온다.
솔로몬 성전기둥 부어 만든 놋 바다의 지름과 둘레에 나온다.

[역대하 4:2]
또 놋을 부어 바다를 만들었으니 지름이 십 규빗이요 그 모양이 둥글며 그 높이는 다섯 규빗이요 주위는 삼십 규빗 길이의 줄을 두를 만하며

이렇게 자연계, 우리 생활 속에는 많은 숫자가 있다.

매화꽃, 배꽃의 꽃잎은 5 장
튤립의 꽃 잎은 6 장
등등이다.

더 복잡해지면 …

(피보나치 수열)
나뭇잎, 가지가 줄기에서 싹이 나는 순서는 피보나치 수열을 따른다.
그러면 모든 잎이 골고루 태양 빛을 받게 된다.

(아보가드로 상수)
모든 기체의 단위 부피에 들어있는 분자의 숫자는 똑같다.
아보가드로 상수라고 한다
(아보가드로 상수) = 6.02214179000000000000000

(플랑크 상수)
원자핵, 전자, 빛의 에너지 등 양자 역학을 설명할 때는 플랑크 상수가 사용된다.
예를 들면 빛, 전자파의 에너지는 (플랑크 상수) x (진동수) 가 된다.
전자파의 에너지는 항상 플랑크 상수만큼 띠엄띠엄 떨어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중간 값은 없다. 연속적이지 않다는 말이다.

또, 전자가 원자핵 주위를 돌 때에 전자가 빠른 속도로 회전하면 원자핵으로부터 거리가 멀어지는 데
반드시 플랑크 상수만큼의 에너지가 떨어진 거리를 회전할 뿐 중간 거리는 없다.
연속적이지 않다는 말이다. 이런 현상을 양자화현상이라고 한다.

플랑크 상수는 양자 역학을 설명할 때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숫자이다.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숫자를 들자면 너무 너무 많이 있다.
굳이 이런 숫자들을 들먹이는 것은 숫자만으로도 너무 머리가 아프다는 것이다.

이런 것이 모두 자연을 설계하고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그 기쁘신 뜻대로 자연에 숨겨놓은 숫자들이다.
이 숫자들은 우리의 삶에 완전히 녹아들어 우리의 삶을 과학 법칙 안에서 지배하고 있지만 우리들은 그것을 인식하지 못한 채 평생을 살고 있다.
그리고 살아가는 데 그런 것을 전혀 인식할 필요도 없다.
현명하신 과학자들께서 자연의 법칙을 이해하고 감탄하는 데 쓰일 뿐이다.
그래도 정말로 기가 막히는 진리의 숫자인 것은 틀림없다.

일반인인 우리는 그것을 왈가왈부하며 따질 필요가 전혀 없다.
그런 것을 없는 듯이 무시하고 살아도 그만이다.
사람이 그런 것을 무시하고 살아도 우주의 운행, 원자의 운행 그리고 인생살이는
우리가 알든 모르든 그런 숫자의 원리를 따라 지배 받으며 살아가고 있다.
그저 숨어있는 진리에 관심이 많고 명석하신 학자들께 맡겨두면 된다.

그러다가 그 숫자, 원리가 재주를 넘고 넘어 핵폭탄, 디지털 카메라 같은 것이 되면 갑자기 우리의 삶에 강력하게 뛰어든다.
그러나 그것은 그 때의 문제이다.

성경에도 숫자가 많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니까 그 숫자들도 무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가정 혹은 믿음이다)
그 뜻을 알려고 애쓰는 분 (신학자)도 있을 것이다.
뭔가 논리적으로 유추해 낸 분은 그것이 신기하고 자랑스러울 것이다.

생활인으로 믿음을 가지고 사는 나 (우리), 하나님의 뜻 명령이라고 자기가 주장하는 것조차도
제대로 순종 실천하지 못하고 사는 나는 그런 것에 관심을 쓸 지혜도 여력도 없다.
비록 그 것이 진리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그런 것을 알아내라고 하나님께서 명령하시지도 않았다.

내가 하나님의 뜻, 명령이라고 믿고 있는 것도 제대로 순종 실천하지 못하는 데 언제 거기에 신경 쓸 여력이 있겠는가?

나는 로마서 14:22을 볼 때마다 가슴이 먹먹하다.
네게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
자기가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정죄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내가 하나님의 명령이며 진리라고 스스로 믿고 있는 말씀에도 제대로 순종 실천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다른 것에 시간과 마음을 쓴다는 말인가?
내가 진리로 받아들인 하나님의 말씀 앞에 자신을 엄격히 봐야 하며 불필요한 논쟁을 피해야 한다 생각한다.

[에스라 7:10]
에스라가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하였었더라
에스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1. 연구) – (2. 순종, 실천) – (3. 가르침) 의 순서로 대했다.
나도 그렇게 해야 한다고 믿는다.
물론 평신도인 내가 가르치려 한다면 좋아할 사람이 없을 것이라 예상 되지만 말이다.
감히 꿈도 꿀 수가 없다.
(
아마 목사님들도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비록 그들이 혹시, 성경을 별로 많이 읽었든 아니든 …
성경 많이 읽는 것이 다가 아니다 라고 하는 말을 몇 번 들었다.
성경 많이 읽은 평신도가 무슨 말을 할지 믿을 수 없는 것이다.
)
그래도 1, 2 는 할 수 있으니 좋은 일 아닌가?

위에 말한 중요한 숫자의 의미를 조금이나마 알고 있는 것은 내가 물리학을 공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상 생활에서 나는 그런 숫자를 잊어버리고 산다.
가끔 흥미 삼아 생각할 뿐이다.

성경에 나온 많은 숫자들도 그런 정도로만 이해하고 있다.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뭐, 호기심에 가끔 관심을 가질 수는 있겠다.

성경에는 우리에게 의미를 풀어보라고 도전 격려한 숫자가 있다.
666 이다.
[요한계시록 13:18]
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한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 보라 그것은 사람의 수니 그의 수는 육백육십육이니라

나는 이 말씀은 아무리 생각해도 “너희 들은 해봐도 다 틀릴 것이니 재미 삼아서 해봐라”라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재미거리를 주신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래서 666 감히 해석하지 않는다.
남의 해석도 그런가 보다 하고 흘려보낸다.

그래서 나는 성경에 나온 숫자를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가끔 재미 삼아 생각해 본다.
(
물론 그것을 진지하게 연구하는 분은 존중한다.
순수학문은 진리 그 자체를 이해함이 목표이지
효용성은 나중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하나님은 순종의 대상이지 연구의 대상이 아니라는 생각을 한다.
또 반면에
하나님을 잘 알면 순종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도 된다.
모든 것은 하나님을 향한 마음의 자세에 의해 달라질 것이다.
)

이 글을 여기까지 읽어주시는 분이 과연 계실까?
여기까지 읽어주신 당신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김종호 목사님은 구약 성경에 나타난 숫자와 그 의미에 대헤 흥미로운 글을 쓰셨다.
재미있고 유익하여
페이스 북에서 목사님의 명 강의 본문을 허락을 받고 인용한다.

누가 이 글을 가지고 이단 운운했다는 데…
그런 분, 참 편협하고 꽉 막힌 분일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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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ngho Kim
8월 17일 오전 4:32 ·
【성서 이야기. 27】

구약성서 수비학(數秘學 Numerology)

성서에 많은 숫자가 등장하는데
성서학자들이 이 숫자들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신학적으로 해석해야 하는가에 대한 논쟁이 이어져 왔다.

창세기에 나오는 족장들의 생물학적 나이를 비교해 보면
아브라함과 야곱이 15년을 같이 살았고,
이삭은 요셉이 애굽에 팔리고 나서도
그가 29세가 될 때까지 생존해 있었다.
야곱이 하란에서 돌아온 후 그의 아들들과
약 30년이란 시간을 함께 보낸 것이 된다.
야곱이 라반의 집으로 도망간 시기는
그가 애굽왕 바로 앞에 섰을 때 130세라고 고백한 것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서 얻어진 값으로
계산하면 77세에 라반의 집에 도착한 것이 된다.
그 후 7년이 지나 레아와 라헬과 결혼했으니
야곱의 나이 84세가 된다.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나이가 많았음을 보여 준다.
“야곱이 바로에게 고하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일백삼십 년이니이다”(창47:9)

문학비평학자들은
구약성서에 나타난 숫자는 확률이나 통계가 아니라
히브리인들의 신비스럽고 치밀한 계산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유대교 신비주의인 카발라(Cabalah) 학파는
수 세기에 걸쳐 숫자로 하나님의 비밀을 캐려는 노력을 해왔다.
이들은 구약성서의 본문 속에 나타난 단어 하나, 낱말 하나에
하나님의 영원한 진리가 숨어 있으며
그 진리는 수(數)의 체계로 구성되어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 결과들을 내놓았다.

족장들의 마지막 나이를 비교해 보면 일정한 규칙이 존재한다.
아브라함/ 175세 = 7×5×5 = 7×5의 제곱 (7+5+5 = 17)
이삭/ 180세 = 5×6×6 = 5×6의 제곱 (5+6+6 = 17)
야곱/ 147세 = 3×7×7 = 3×7의 제곱 (3+7+7 = 17)
요셉/ 110세 = 5의 제곱+6의 제곱+7의 제곱  = 25+36+49 = 110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나이는
7, 5, 3으로 둘씩 줄어드는 수에
하나씩 늘어나는 5, 6, 7의 제곱을 곱한 수로 나타난다.
그리고 각각의 수를 더하면 17이라는 수를 얻게 된다.
요셉은 각각의 제곱수를 더한 값과 일치한다.
대각선(7+6+7=20, 5+6+3=14, 5+6+7=18)의 수를 더한 값을 더하면(20+14+18) 52가 되고,
52를 2로 나누면 26이 된다.
17과 26은 성서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히브리어 알파벳은 모두 22개의 문자로 구성되어 있고
영어 알파벹 A가 1, B가 2, C에 3을 부여하는 식으로
각 문자들은 숫자를 내포하고 있다.
그 의미하는 숫자는 아래의 그림과 같다.

히브리어 알파벳의 조합을 더해서 숫자를 찾아보면
여호와를 뜻하는 יהוה(야훼)라는 글자에
그에 맞는 숫자를 대입하면 26이 되고(5+6+5+10=26),
수치들의 합은 17(5+6+5+1=17)을 얻을 수 있다.

하나님께만 허용될 수 있는
‘영광’ , כבד (카보드, 4+2+20=26)도 모두 더하면 26이다.
철자의 순서 수치는 4+2+11=17이 된다.

이월 곧 그달 17일에 홍수가 시작해서(창7:11),
칠월 곧 그달 17일에 끝난다(창8:4).
족장들의 이름에서도 26이라는 숫자를 찾을 수 있다.
이삭(יצחק, 이츠학, 100+8+90+10 = 208 [26×8]),
야곱(יעקב, 야아콥, 2+100+70+10 = 182 [26×7]),
요셉(יוסף, 요세프, 80+60+6+10 = 156 [26×6])
모두 26의 배수로 되어 있다.

족장들의 나이와 이름에서 17과 26이라는 숫자가 발견된다.
‘여호와의 이름’과 ‘거룩’을 뜻하는 단어들에서
발견되는 이 숫자와 같은 나이를 산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이 실제로 그 나이를 살았을까?
175세, 180세, 147세, 110세에서
한 살이라도 더하거나 빠지면 이런 수치를 발견할 수 없다.

여기에 구약성서의 신비로움이 나타난다.
이들의 이름과 나이 속에서 하나님의 숫자가 발견된다.
우리가 말하는 기적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예수님은 유월절인 그달 14일에 죽으시고
3일 후에 즉 17일에 부활하셨다(골2:15).
부활하신 예수께서 오른편에 그물을 대라 하실 때
잡은 물고기가 왜 153마리였을까…

성서엔 153이라는 숫자가 특별히 사용된다.
‘유월절’(הפסח, 하페사흐, 출12:21) 8+60+80+5=153
‘신실한 자’(נאמן הוא, 네에만 후, 민12:7)
1+6+5+50+40+1+50=153
‘나는 여호와 너의 하나님이라’(사48:17), אני יהוה אלהיך
(아니 야훼 엘로헤카)
20+10+5+30+1+5+6+5+10+10+50+1=153
‘하나님의 자녀들’(בני האלהים, 베네 하엘로힘)
40+10+5+30+1+5+10+50+2=153

예수께서 처음 베드로를 사람 낚는 어부로 부르셨다(마4:19).
이 말씀이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이
153 마리를 잡음으로 성취된 것이다(요21:11).
하나님의 자녀들을 낚는 어부가 된 것이다.
153은 1부터 17까지를 더하면 만날 수 있다.
153 = 1+2+3+4+ . . . . . . . . . +15+16+17

출애굽 할 때 백성들의 수가 장정만 603,550명이다.
이 숫자도 ‘이스라엘 총인원’과 ‘하나님의 자녀들’이란
히브리어 글자의 수치를 합하면 얻을 수 있다.
이스라엘 자녀 총인원은 כל ראש בני ישראל
(콜 로쉬 베네 이스라엘)
30+1+200+300+10+10+50+2=603, 300+1+200+30+20=551
603,551이란 숫자가 나온다.
“계수된 자의 총계는 육십만 삼천오백오십 명이었더라”(민1:46)

롯을 구출하기 위해 따라나선 아브라함의 부하 318명은
아브라함의 종 엘리에셀 אליעזר (엘리에제르)의 수치 합과 같다. 1+30+10+70+7+200=318

모세가 애굽, 광야, 백성들과 40년을 함께 했고
사울, 다윗, 솔로몬왕이 40년을 왕 노릇 했다.
예수님도 40일 동안 광야에서 금식하셨다.
이 모두가 우연의 일치인가?
40이란 숫자는 무엇인가를 이루기에 충분한 시간을 나타내는
신학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러므로 창세기에 나타나는 아담의 후손들의 나이와
족장들의 나이도 신학적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900세 이상의 나이를 설명하기 위해
무리한 해석을 시도하게 된다.

눈이 어두워져서 아들들도 분간하지 못하고 잘못 축복해버린
당시 이삭의 나이는 137세였다.
그렇다면 그는 180세에 생을 마감할 때까지
43년 동안 침대에 누워 생활한 것이 된다.
이러한 삶이 축복받은 삶이라 볼 수 없다.

구약성서의 숫자들은 그 자체가 영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때론 숫자가 가장 과학적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구약성서 속의 철자 하나, 낱말 하나에도
하나님의 영원한 진리가 숨어 있다고 보며
구약성서 해석의 신비로움을 발견할 수 있다,
이는 신약성서 헬라어에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그러므로 성서에 나오는 모든 숫자들은
신학적인 해석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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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특강했던 자료 요약한건데..
페북에 히브리어 쓰기가 쉽지 않네요…
그래도 정확하니까
오랫만에 산수 공부 해보세요….^^
숫자만 보면
짜증나시는분은 그냥 통과하시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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